[ 발표작품 ]

연자시편 - < 쇄환刷還의 전설 > - 피로 쓴 망향가望鄕歌 -한국문학신문 2021년 8월 18일

高 山 芝 2021. 8. 20. 13:16

< 쇄환刷還의 전설 > - 피로 쓴 망향가望鄕歌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함이 좌초되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포로가 된

전라좌병사全羅左兵使 우후[虞候:참모장] 이엽李曄

 

조선의 수군대장이라는 말에

간바쿠[関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금과 은, 비단을 하사하고

그를 나츠카 마사이에 [長束正家]에게 맡기었네.

 

어찌하여 삼한三韓의 당당한 후예가

이역에서 짐승들과 섞일 수 있으랴

 

일본의 봄날, 이 쌓이고

서쪽으로 가는 바람, 만감萬感이 교차하네.

고향의 옛집, 근역화槿域花 꽃잎 지면

선영의 무성한 잡초, 어느 누가 예초刈草할까

 

비단필을 팔아 선박을 마련해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도모했지만

도모노우라[]에서

왜군의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가슴에 칼을 꽂은 채 바다에 몸을 던졌네

 

아버지는 그를 잃고 달 밝기를 기다리며

정신을 잃은 그의 아내 밤을 새워 울고 있네

 

뱃속에 소금을 넣은 그의 시신屍身

교토[京都]에 보내져

우차牛車에 사지四肢가 찢기었네

 

간바쿠[関白]의 호의마저

거절한 그의 기백氣魄 살아남아

 

서슬 푸른 파도가 되었네

쇄환刷還의 전설이 되었네

[1]

 

임진왜란의 참상을 목격한 일본 승려 게이넨[慶念]일본 병사들은 포악하고 잔인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은 눈에 띠는 대로 베어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서 사슬로 목을 묶어 끌고 갔다.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에서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조선 사람의 아이를 빼앗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를 무엇에 쓸 작정인가.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민간인을 피로인被擄人이라고 부른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는 남자가 3-4만 명이 되겠고 늙은이나 약한 여자의 수는 갑절이라고 정희득[15996월 송환]은 상소문에서 주장을 했지만 학계에서는 대략 십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으로 납치된 피로인들 중 일부는 중국, 동남아, 인도 등에 노예로 팔렸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의 7년 전쟁으로 살 길이 막막해진 대마도는 조선과의 교역이 절실 했다.매년 조선으로부터 지원받던 100 석의 세사미歲賜米 마저도 끊어진 상태였다. 1599년부터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인 포로를 조선에 보내주면서 교역 재개를 간청했다. 15996월 함평 출신 정희득 등 15명이, 16002월 합천 유생 곽진방 등 160명이 조선에 돌아왔고, 4월에도 321, 5월에는 영광 출신 강항 등 38명이 송환되었다. 1601년에 250, 1602229, 1603200명이 일본에서 송환되었다.

 

1604년 조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중을 살피기 위하여 승장僧將 사명당四溟堂을 탐적사探賊使란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16053월 사명당은 후시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이에야스는 나는 임진년 당시에 관동에 있었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조선과 나 사이에는 원한이 없다. 화친을 원한다.”고 하였다. 사명당은 에도 막부의 뜻을 확인하고 포로 1,39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607(선조 40)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 했다. 쇄환刷還이란 모두 데려 온다.’는 뜻이다. 는 빗자루란 의미이다. 일본에 끌려간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을 빗자루로 쓸듯이 모두 본국으로 데리고 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1607227일 정사 여우길, 부사 경섬 등 총 504명의 쇄환사절이 부산항을 출발했다. 사신은 국서를 전달한 후에는 오로지 쇄환에 주력하였다. 억류된 포로의 송환을 요청하면서 쇄환이 잘 되어야 양국의 교류가 영속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에도막부는 장군의 명령으로 각지에 쇄환을 하달하였다. 이 명령에 가장 적극 움직인 이는 대마도주였지만 막부의 쇄환 명령은 지방까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혼다 마사노부는 피로인들은 일본에 온지 거의 20여년이 되었다. 그 중 결혼하거나 자녀를 가진 자들도 있다. 귀국은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기되 본인이 원하면 귀국시키라는 것이 장군의 엄명이라고 하였다. ‘본인이 원하면 귀국시키라는 단서가 붙었으나 본인이 원해도 놓아주지 않자 도망쳐온 피로인도 있었다. 626일 사신과 함께 쇄환된 사람은 1,418명에 불과하였다. 부사 경섬은 <해사록>에 구우일모九牛一毛라고 기록했다. 1609[광해군] 조선은 대마도주와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교역을 재개하였다. 대마도주는 예전처럼 세사미두歲賜米豆100석을 받게 되었다.

 

[2]

 

이엽李曄에 관한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유성룡의 이엽의 유사遺事그리고 강항의 간양록看羊錄등에 등장한다. 이엽은 연안 이씨 이억복의 장자로 용인 하동촌 출신이다. 무과에 급제한 그는 금성현령으로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병사 소속 우후[참모장]로 참전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함이 좌초되어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에게 생포된 그는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유성룡은 이엽의 유사를 이렇게 기록했다. “조영한이 말하기를, “일본에 있을 때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 이엽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경상도 수영우후로 있다가 한산도의 전투에서 패배한 바람에 적장 가토[加籐淸正]에게 붙잡혔는데, 그가 나를 일본으로 보내면서 이 사람은 조선의 수군 대장이다. 지난날 누차 왜병을 이긴 자는 모두 이 사람이었다고 하니, 관백이 그 말을 믿고 이엽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날마다 그의 궁중으로 불러들여 연회를 열고 상으로 금은과 비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주었는가 하면 큰집을 비워주어 살게 하였다.

 

이엽은 그 비단과 금은을 풀어서 왜인들을 유혹하여 도망쳐 돌아오려고 한 끝에 수십 명을 얻었고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 있는 우리 백성과 돌아오기로 약속한 자도 3, 40명이나 되었다. 큰 배 한 척을 사들여 떠날 날짜를 정했는데, 우리 백성들 중에 한 명이 다른 뜻이 있어 이엽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떠난 뒤에 왜인이 알면 반드시 병사가 추격할 것이다. 내가 잠시 이곳에 머물러 변화를 지켜보겠으니, 그대는 먼저 배를 타고 출발하여 3일 거리의 해변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라. 내가 마땅히 육로를 통해 동행을 뒤따라갈 것이다.’고 하였다. 이엽이 그와 만날 약속을 단단히 하고 떠났다.

 

이엽을 지키던 왜장이 이엽을 잃어버리고 관백에게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보내어 잡으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자, 거리에다 방을 붙여 이엽이 간 곳을 가르쳐 주는 사람에게는 쌀 2백 석을 주고 다른 물건도 이에 비례하여 준다.’고 하였다. 이때 이엽을 속이고 뒤에 머물렀던 자가 나와서 말하기를, ‘내가 이엽이 돌아간 곳을 알려주면 네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니, 왜장이 매우 기뻐하며 손가락을 찔러 나온 피로 글을 써서 신표로 주었다. 그 사람이 길을 인도하자 왜장이 군사를 이끌고 약속한 장소로 쫓아갔다. 이엽이 과연 배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추격하는 병력이 대대적으로 오는 것을 보고 칼을 뽑아 자신의 배를 찔러 죽었고 동행인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왜장이 이엽의 뱃속에다 소금을 넣어서 싣고 들어가 관백에게 고하였다. 저자에 이엽의 목을 베어 매달고 같이 도망한 수십 명은 불로 지져 죽였는데, 매우 참혹하였다.”

 

강항의 <간양록>에는 전라좌병영의 이엽李曄이 도망가다 발견되어 자결했는데, 왜놈들이 시체를 건져 환괘의 형에 처했다는 대목이 있다. 환괘의 형이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3]

 

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이 서생포로부터 맨몸으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75일에 우후가 타는 배의 격군이 되어 칠천량에 도착해서 자고, 6일에 옥포로 들어갔습니다. 7일 새벽에는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도착하니 왜선 8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배들이 곧바로 돌진하였더니 왜적들은 모조리 육지로 올라가고 빈 배만 남겨두었습니다.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다 불태우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해 갔습니다. 그때 마침 대마도로부터 건너오는 적선 1천여 척과 마주쳐서 서로 맞붙어 싸우려고 했으나 왜선들은 흩어져서 회피하므로 결국 잡아 섬멸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여 표류하다가 서생포 앞바다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육지로 올라가다가 적들에 의해 거의 다 살육을 당하고, 저만 혼자서 수풀 속으로 들어가 기어서 겨우 목숨을 살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다면 다시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온통 찢어질 것만 같았다. 또 선장 이엽이 왜적에게 붙들려 갔다고 하니 더욱 통분하였다. - <난중일기> - 1597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