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항姜杭의 단장가斷腸歌 >
부친을 찾아 논잠포論岑浦로 가는 도중
왜군에게 붙잡혀 포박된 강항 일행
왜놈들이 간난 아이 용龍과
서녀庶女 애생愛生을 바다에 버렸네
30에 얻은 아들 용龍과
사랑스런 딸 애생愛生이
물결 따라 까막까막하더니
바다 속으로 사라지네
아버지 엄마 아버지 아버지
부르는 소리 바다에 가라않네
애비가 소용 있나 어미가 소용 있나
애닯은 자식 소리 가슴을 쥐어짜네
왜선 한 척이 지나가네
“영광 사람, 영광 사람 없소”
애생愛生 어미의 목소리였네
서로 엇갈린 이후
소식을 몰라
벌써 죽었거니 믿었는데
둘째 형수를 바라보며
울부짖던 그녀
창자를 에이는 피울음 남기고
왜놈들의 구타로 애생(愛生)을 따라갔네.
형조좌랑 강항은 1597년 휴가로 고향에 머물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는 호조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으로 남원에서 명(明)의 장군 양원(楊元)에게 보내는 군량미 수송임무를 담당했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육로로 진격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와 공격 개시 사흘 만에 남원성이 함락되었다. 고향 영광에서 종사관 김상준과 함께 여려 읍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했지만 왜군이 영광을 함락하자 무산되었다. 강항은 두 척의 배에 식구들을 태우고 피난길에 올랐다. 왜선 천여 척이 우수영에 당도했으며 통제사 이순신이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 상의했다. 육지로 가자는 사람과 흑산도로 가자는 사람으로 나눠졌다. 이순신의 선전관이었던 종형이 배안에 장정이 40명에 달하니 통제사와 함께 싸우자 하여 그렇게 결정했다. 그 말을 듣고 뱃사공이 밤중에 자기 자녀들이 있는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려 강항은 부친이 탄 배와 헤어졌다. 이튿날 부친이 탄 배가 영광군 염소로 향했다는 소문을 듣고 염소에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부친을 찾아 헤매던 중 논잠포[論岑浦:영광군 염산면]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수군에 포위되고, 강항은 죽을 각오로 일가족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얕은 수심 때문에 왜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포박되었다. 왜군들은 아들 용(龍)과 서녀 애생(愛生)을 바다에 던졌다. 그 때의 상황을 강항은 간양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린 놈 용(龍)이와 첩의 딸 애생(愛生)의 죽음이 너무나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 하고 부르던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나이 30십에 비로소 얻은 아이다. 이 아이를 가졌을 때다. 어린 용이 물 위에 뜬 꿈을 꾸었다. 그래서 이름을 용이라 지었는데 이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나이 30에 포로로 잡힌 강항은 순천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시코쿠[四國]의 오츠[大津:大洲]성에 이른 강항은 그곳에서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교류하며,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 지리, 과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으로 엮어 몰래 본국으로 보냈다.
“8일 동안 먹지 않았으나 오히려 숨이 붙어 있음이 한스럽다. 그러나 죽지 않은 것은 장차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니, 의미 없이 죽는 것은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 되지 못한다. 예양은 비수를 갖고 다리 아래 엎드려 조맹에 대해 원수를 갚기로 기약했고, 철퇴를 들고 모래밭에 나타나서 장량(張良)의 분을 씻기로 맹세했다.” - '적중견문록' 중 -
강항은 교토에서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를 만나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 왜병에게 붙들려 우와지마[宇和島] 처형장으로 끌려갔으나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교토의 후시미[伏見] 성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 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세이카[藤原惺窩]는 일본 주자학의 개종 조사가 된다. 당시 세이카[藤原惺窩]와의 만남에 대해 강항은 《간양록》에서 "글씨를 팔아 은전을 좀 벌어서 배를 마련하고자", 즉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비용을 벌기 위해 그에게 글씨를 써주었는데, 주자학에 대한 세이카[藤原惺窩]의 열의에 감탄해 그에게 성리학을 가르쳐주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때 세이카[藤原惺窩]와 강항이 필담으로 주고받았던 또는 강항이 세이카[藤原惺窩]를 위해 암기하고 있던 주자학 이론들을 적은 글들은[총 21권] 현재 일본의 덴리 대학[天理大学]에 소장되어 있다. 막부의 귀화 요청을 거부하고 4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그는 후시미[伏見] 성주에게 자신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편지를 여러 번 썼고, 일본인 제자의 도움을 받아 1600년 5월 19일 식솔 10명과 다른 선비들, 뱃사공과 그 식솔 등 모두 38명과 함께 풀려나 귀국하였다
“왜인들의 성질이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와 통교하는 것을 좋아하여 멀리 떨어진 외 국과 통상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깁니다. 외국 상선이 와도 반드시 사신 행차라고 합니다. 교토에서는 남만 사신이 왔다고 왁자하게 전하는 소리를 거의 날마다 들을 수 있으니, 나라 안이 떠들썩한 이야깃거리로 삼습니다. (생략) 먼 데서 온 외국인을 왜졸이 해치기라도 하면 그들과의 통교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반드시 가해자의 삼족을 멸한다 합니다. 천축 같은 나라 도 매우 멀지만 왜들의 내왕이 끊임이 없습니다.”
– 간양록 중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 중 -
귀국한 강항은 조정에서 내린 관직을 사양하며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사직소를 올린 후 부임하지 않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 등의 제자를 두었다.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 조용필의 간양록(1980) 가사 -
조용필의 노래로 유명한 간양록(看羊錄)은 강항이 일본에 억류되어 있을 때 겪으며 보고 들은 일을 귀국하여 기록한 책이다. 죄인이라는 뜻에서 처음에는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는데, 1656년(효종7) 가을 이 책이 간행될 때, 그의 제자들이 책명을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쳤다. 양을 돌본다는 의미의 ‘간양(看羊)'은 중국의 한무제(漢武帝)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포로로 붙잡혀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蘇武)의 충절을 상징한 말이었다.
간양록(看羊錄)의 내용은 ‘내가 겪은 정유재란’, ‘적국에서 올린 상소’,‘내가 듣고 본 적국 일본’,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 제자 윤순거가 쓴 발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란에 대비해야 할 국내정책에까지 언급하고 있다. 간양록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수많은 필사본이 불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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