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연자시편 - 천손일기 - < 구지가(龜旨歌) > - 구지가(龜旨歌)를 왜곡한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 – 한국문학신문 2022년 1월 5일(제528호)

高 山 芝 2022. 1. 7. 14:55

 천손일기 - < 구지가(龜旨歌) > - 구지가(龜旨歌)를 왜곡한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

 

서기 423월 삼짓날 계욕일(擧浴日)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구간(九干)들이 무리를 이끌고 구지봉에 모였네

 

여기가 어디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네

구지입니다구간(九干)이 대답했네

성지(聖旨)를 받으라백성들이 엎드렸네

 

하늘이 이곳에 나라를 세우라 명령했다

너희들은 이렇게 노래하고 춤을 추라

 

龜何龜何 신이여, 신이여

首其現也 왕으로 현신하소서

若不現也 (만약 왕으로)현신하지 아니하면

燔灼而喫也 (우리는)불에 타 죽나이다(필자 해석)

 

구간들과 백성들은 하늘의 음성에

설레임과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네

 

자주색 끈에 묶인 붉은 보자기

하늘에서 내려 왔네

 

보자기에 싸인 금합자(金合子)

해처럼 둥근 황금빛 알 여섯 개 들어 있었네

 

아도간(我刀干)의 집 평상위에

금합자(金合子)를 모셨네

 

다음날 아침

황금알 여섯 개는

여섯 명의 준수한 동자로 변했네

 

여섯 명의 동자는

가장 먼저 태어 난 동자

수로(首露)는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었네

 

다섯 명의 동자는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의 왕이 되었네

 

옛 사람들은 거북 등에 새겨진 주름살을 구배문(龜背文)이라 해서 이것을 해석하여 점을 쳤다. 고대사회에서 거북은 신탁(神託)의 영물이다. 거북 구() 자에, 성지(聖旨)를 뜻하는 뜻 지() 자가 들어 있는 구지봉(龜旨峯)은 가야국에 대한 신탁의 장소였다. '영신군가(迎神君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로 전해진 구지가(龜旨歌)는 가락국(駕洛國)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강림신화(降臨神話)에 삽입된 노래이다. '삼국유사' 2<기이(紀異)> 2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가락국에 아직 임금이 없어 9명의 추장(酋長)이 백성들을 다스리던 서기 423, 계욕일에 마을 북쪽 구지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마을 사람 이삼백 인이 그 곳에 모이니, 사람의 소리가 나는데 그 모양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구간(九干) 등이 말하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말하되, '이 곳이 어디냐?' 대답하되, '구지입니다.' 또 말하되, '하늘에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건국하고 임금이 되라 하였다.

 

너희들은 구지봉의 흙을 파 정상에 모우면서 신이여, 신이여 / 왕으로 현신하소서 / (만약 왕으로) 현신하지 아니하면 / (우리는) 불에 타 죽나이다.” 라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면 너희를 다스리는 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하였다. 구간 등이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 얼마 후에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이 6명의 공자로 변했다. 제일 큰 황금 알에서 맨 처음 현신(現身)한 공자가 수로왕(首露王)이다. 여섯 명의 공자는 6 가야(伽倻=駕洛)의 왕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난 해부터 일본의 사학계는 조선사 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삼국유사의 해제나 서문을 통해 향가를 창해유주(滄海遺珠)라며 특별히 언급했다.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郞)는 향가의 철자법이 일본의 만요가나(萬葉假名)와 같다며 조일양국어동계론(朝日兩國語同系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동계론에 집착한 배경에는 식민지 경영의 시대 논리에 부응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는 향가와 이두를 체계적으로 해독한 최초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23년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서동요>, <처용가>, <풍요> 3편을 해독한 연구를 바탕으로, 신라 향가 25수 전체를 처음으로 해독했다. 천년 동안 해독하지 못한 향가의 수수께끼. 그는 향가 25수 주해와 함께, 향가 형식과 이두 해독 방법을 제시했다

 

"내가 조선어를 알게 된 것은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郞) 선생 덕분이다. 메이지 39(1906) 내가 도쿄제대 언어학과를 졸업할 당시, 가나자와 선생은 '일선양어동계론'(日鮮兩語同系論)을 발표하여 학계에 물의를 일으켰다. 나도 이때 조선어에 대한 이상한 흥미와 함께,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선 가나자와 선생에게 언문(諺文)을 배웠다. 한일합병이 되기 전인 메이지 43(1910) 조선에 와서는, 소위 총독부 편집서기란 직함으로 남산정(南山町)에 머물면서, 일본어는 조금도 모르는 최아무개(崔某)에게 부탁해서 "문을 열어주세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같은 평소 쓰는 말부터 손짓발짓으로 배웠다. 그러나 관청에 매인 몸이라 말을 배우며 규장각에서 고문서를 찾아볼 시간이 없어 안타까운 적이 많았다.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마에마 쿄사쿠(前間恭作) 두 선생으로부터 지도를 많이 받았다."

-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 나는 왜 조선말을 연구했는가’ -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지도를 받았다고 고백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와 마에마 쿄사쿠(前間恭作)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어용학자들이다. 19193, 1운동이 일어나자 무단정치(武斷政治)로는 무리라고 판단한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치(文化政治)라는 미명하에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얼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는 시책을 추진했다. 19198월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겉으로는 무단정치를 버리고 조선일보 발간을 허용하는 등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도, 한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교활한 교육정책이 시행되었다.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 총독은 부임하자마자 아래와 같은 교육정책 지침을 발표했다.

 

먼저 조선인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 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 악행들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조선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체일 것이다

 

명성황후를 시해(弑害)한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에 가담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937년에 발표한 일본서기 조선관계 지명 고()’를 통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신공(神功) 49(369)에 야마토 왜가 충청도와 전라도, 제주도를 백제에게 주었다고 왜곡 기술하여 김해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처럼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도 조선의 향가와 이두 및 조선의 방언을 연구한 학자라는 사실이다.

 

190511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은 외교권을 이양하는 중대사안인 만큼 전권위임장과 비준서가 있어야 한다. 일본은 국제법에 따른 형식과 절차대로 문서를 작성하려고 했으나 '조선외교위탁조약'이란 명칭을 본 고종(高宗)이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강제로 모아 놓은 대신들도 완강히 저항했다. 특히 협약서에는 조선 외부(外部)대신의 서명이 필요했으나 외부대신의 직인이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역관 마에마 교우사쿠(前間恭作)가 헌병을 대동하고 조선 외부(外部)로 들어가 외부대신 직인을 탈취해서 강제로 서명, 도장을 찍음으로 협약서가 완성되었다.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는 정상적인 절차가 아닌 헌병을 대동하고 조선의 외부(外部)에 들어가 외부대신의 직인을 탈취하여 날인한 마에마 교우사쿠(前間恭作)와 가야사(伽倻史)를 날조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의 지도를 받았다.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932년 발표한 <화랑고(花郞攷)>에서 신라의 화랑을 남색(男色)집단이었으며 화랑을 따르는 낭도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킴으로써 화랑도의 단결력을 높였다고 주장하여 조선의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비하했다. 그들은 임나일본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가야사를 비하시켰다.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의 지도를 받은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는 구지가龜旨歌)가 영신군가(迎神君歌)임에도 불구하고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라고 해석하여 은연중에 김수로왕의 신적 권위를 떨어뜨렸다. 구지가(龜旨歌)의 구() 자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양에서는 거북을 신령스러운 존재로 간주하여 주술(呪術)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만. 노래의 제목이 '영신군가(迎神君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이기 때문에 신탁의 전령사인 거북을 신()으로 해석함이 온당하다. ‘머리 수()’도 영신군가(迎神君歌)이기 때문에 머리보다는 으로 해석해야 옳다.

 

나로 하여금 국문학 고전 연구에 발심(發心)을 지어준 것은 일본인 (조선)어학자 오구라 신페이 씨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란 저서였다고 밝힌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은 그의 수필집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첫째, 우리 문학의 가장 오랜 유산, 더구나 우리 문화 내지 사상의 현존 최고(最古) 원류가 되는 이 귀중한 향가(鄕歌)의 해독을 근천년래 아무도 우리의 손으로 시험치 못하고 외인의 손을 빌었다는 그 민족적 부끄러움, 둘째, 나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한 민족이 다만 총, 칼에 의해서만 망하는 것이 아님을 문득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문화가 언어와 학문에 있어서까지 완전히 저들에게 빼앗겨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아, 내가 혁명가가 못 되어, , 칼을 들고 저들에게 대들지는 못하나마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자에는 약간의 천분(天分)이 있고 맘속 깊이 원()도 열()도 있는 터이니 그것을 무기로 하여 그 빼앗긴 문화유산을 학문적으로나마 결사적으로 전취, 탈환해야 하겠다는 내 딴에 사뭇 비장한 발원과 결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