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王)과 도끼 >
임금 왕(王) 자를
천지인(天地人)을 뚫는 곤(丨)으로
해석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저자 허신(許愼)
임금 왕(王) 자는 도끼날과
도끼머리 중간에 있는
도끼자루 구멍을 형상화한 상형문자이네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위의 상징으로
고대인들은 도끼를 사용했네
왕의 옷 곤룡포(袞龍袍) 곤상(袞裳)에
도끼와 아(亞) 자 모양
보불(黼黻)을 수(繡) 놓았네
목숨을 내놓고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린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도끼에 생명(生命)을 맡겼네.
직언(直言)을 고(告)했네.
도끼는 왕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강제력의 상징이었다. 도끼에는 백성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담겨있었다. 전쟁이 발생하면 왕은 출정하는 장수에게 도끼를 하사했다. 이는 왕의 생사여탈권을 그 장수에게 이양한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의 관료나 유생 중에는 도끼를 짊어지고 대궐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왕의 생사여탈권인 도끼로써 자신의 목을 치라는 목숨을 건 직언이었다.
도끼는 선사시대에 발명한 도구이다. 석기시대에 돌도끼가 제작된 이래,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이어 현재에도 유용한 도구로 도끼는 사용 중이다. 도끼는 보통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도끼 자체와 도끼자루이지만 도끼 자체는 도끼의 날과 반대쪽의 도끼머리 그리고 중간에 도끼자루를 끼우는 구멍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세 부분의 모습을 형상화 한 상형문자가 왕이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의 무덤에는 돌도끼를 부장한 유적들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남자인데, 특히 부족장 등의 권력자다. 도끼로 나무를 베어 넘기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남성들이었다. 동양은 남성 위주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역사를 주도한 왕(王)과 선비 사(士=무사, 선비), 아비 부(父) 등이 모두 도끼의 상형문자이다. 도끼로 나무를 베거나 목을 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 것으로 도끼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력을 상징했다. 도끼는 왕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이용되었다. 왕이나 황제는 즉위식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아홉 가지 문양이 들어간 신성한 옷(九章服)을 입었다. 그 문양 중의 하나가 도끼다.
아홉 가지 문양 중에 용이 맨 위에 있다. 이를 곤룡(衮龍)이라 했다. 곤룡만 들어간 옷을 곤룡포(衮龍袍)라 한다. 구장복의 장문(章紋)은 왕이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필요한 덕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의에 들어가는 다섯 가지 장문은 양 어깨에 용(龍), 등 가운데에 산(山), 양쪽 소매에 화(火=불꽃무늬), 화충(華蟲=화려한 꿩), 종이(宗彛=효를 상징, 祭器)를 넣되 오른쪽 소매의 종이(제기) 안에 용맹한 호랑이를 왼쪽 소매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원숭이 장문을 넣었다. 하의에는 조(藻=수초, 유연함과 화려함), 분미(紛米=쌀, 백성의 생명), 보(黼=도끼), 불(黻=亞 자, 버금의 무리)의 장문을 넣었다. 아홉 가지 문양 중에서 도끼문양의 보(黼)는 징벌및 생사여탈권을 상징했으며 왕이 사용하는 병풍과 방석 등 여러 곳에 이용되었다.
조헌(趙憲)은 1591년(선조 24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의 사신을 보내어 정명가도(征明假道)를 강요했을 때 충청도 옥천에서 상경하여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며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이로부터 270여 년이 지난 1876년(고종 13년) 2월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광화문에 엎드려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黑田淸隆)의 목을 베라고 도끼를 들고 엎드린 것이다. 이때 최익현은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서는 안 될 다섯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우리의 힘은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일방적으로 끊임없이 저들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할 것이다. 둘째, 통상 조약을 맺으면 생산의 한계가 있는 우리의 농산물과 무한하게 생산할 수 있는 저들의 공산품을 교역하게 될 것이니 우리 경제가 지탱할 길이 없다. 셋째, 왜인은 이미 서양 오랑캐와 일체가 되어 있으니 이들을 통하여 사악한 서양 문화가 들어올 때 인륜이 무너져서 조선 백성은 금수(禽獸)가 될 것이다. 넷째, 저들이 우리 땅을 자유 왕래하고 살면서 우리의 재물과 부녀자를 마음대로 약탈할 때 막을 수가 없다. 다섯째, 저들은 재물과 여색만 탐하는 금수이므로 우리와 화친하여 어울릴 수가 없다. 최익현의 「병자지부소 丙子持斧疏」는 그 내용과 형식의 과격성 때문에 그를 처벌하라는 정부 대신의 상소가 줄을 이었다. 그는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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