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여! 나의 때여! 동학의 세상이여! >
제2부 정감록(鄭鑑錄)이 만들어 낸 발칙한 봉기꾼 - (제1회)
(1)
정감록(鄭鑑錄)은
체제 비판과
새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현실변혁의 주술을 갖고 있었네
말세의 구원신앙으로
변한 정감록(鄭鑑錄)은
수많은 신흥종교의 연원이 되어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비결이 되었네
수도 천도(首都遷都) 설과
역성혁명(易姓革命) 설은
메시아의 출현을 부추겨
민란(民亂)의 원인을 제공했네.
진인(眞人)이나
이인(異人)의 출현을
기대하는 생각이나
세력이 혼재한 시대적 상황에서
조선의 정치는 유학(儒學)에 묶여 있었네
(2)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양영렬은
이필제(李弼濟 1825년 순조 25년-1871년 고종 8년)를
반고(班固=漢書의 저자)와 사마천(司馬遷=史記의 저자)
소진(蘇秦=전국시대 說客)과 장의(張儀=전국시대 說客)로 비유했네
충청도 홍주목(洪州牧=홍성 일대) 출신의
이필제의 증조부는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지낸 이완(李烷)
조부 이원규(李元圭), 부친 이종원(李鍾源)
외조부는 안규묵(安奎黙)이었네
홍성일대의 향반(鄕班)인 그는
아명(兒名) 근수(根洙)를 필제(弼濟)로 개명하고
결성(結城=홍성군 결성면) 판교(板橋)에 사는
안동 김 씨의 딸과 결혼을 했네
다시 이름을 홍(弘)으로 바꾼
그는 무과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벼슬을 얻지 못한
‘출신(出身)’ 신분이었네
* 주석 : 출신(出身) - 조선시대 때 벼슬길에 처음 나서는 사람 또는 과거 시험의 합격자를 가리키는 말.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특히 무과 시험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각 감영(監營)에서 치르는
무과 초시에 합격한 1만여 명 중에서
무관 벼슬을 받는 사람은
몇 십 명에 지나지 않았네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일반화 된 시대적 상황에서
초시 합격도
거의 뇌물로 이루어졌네.
25세 되던 해 (1850년)
경상도 풍기(豐基) 외가(外家)에 들렸네.
익히 조카의 글재주를 알고 있던
외삼촌 안재억(安載憶)은
풍기의 이름난 선비이자
명의(名醫) 허선(許璿=野翁)에게
이필제(李弼濟)가 지은 시
남정록(南征錄) 10여 수를 보여주었네.
이필제(李弼濟)의 시재(詩才)를 극찬한
허선(許璿)은 연속 3일 그의 방문을 허락하고
마지막 날에는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당부했네.
“나라를 위해 충성하기를
안녹산(安祿山)의 난(亂)을 평정한
당나라의 곽분양(郭汾陽=곽자의)과 같이 하고
우리나라를 위해 원수 갚기를
진나라를 멸망시킨
장자방(張子房)같이 하라
대양국(大洋國, 서양의 나라)은
오래지 않아 천하를 소동시켜
우리에게 심한 독을 끼칠 것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누르고
북쪽으로는 흉노를 막는 일이
그대에게는 어렵지 않을 것인즉
그대는 자애하여
늙은이의 말을 노망났다고 하지 말고
진충보국하여 큰 공훈을 세우라”
* 주석 : 남정록(南征錄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지만 허선(許璿)의 글은 《우포도청등록》 25책에 나와 있다
(3)
아버지 이종원(李鍾源)이
천주학을 믿는다는 혐의로
상주에서 체포되어 옥사하자
이필제(李弼濟)의 삶이 변하기 시작했네.
안동의 이 포수에게
포술을 배운 그는
공주, 해미, 태안 등지를 다니며
불만 세력을 포섭했네.
철종 10년 이필제(李弼濟)는 (1859년)
34세의 나이에 미상(未詳)의 죄목으로
영천 땅에 유배되어
이듬해 1월에 풀려났네.
허선(許璿)의 아들 허간(許侃)은
영천에 귀양 온 그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네
이필제(李弼濟)의 처남 김병원은
친지 박화진에게
매형의 유배지 일화(逸話)를 전했네.
“내가 적거(謫居=귀양)할 때
이곳에 살던 허야옹(許野翁)이
수년전에 죽으면서
그 처자에게 글을 남겨 말하기를
후에 이필제(李弼濟)가 찾아오면
이 글을 전하라고 했다.
승지(勝地) 풍기(豐基)에는
제1지(地), 제2지(地), 제3지(地)가 있다.
하도성수(河圖星數)로 집을 지으면
삼재(三灾)가 침범하지 못하며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필제(弼濟)의 필(弼) 자는 궁궁(弓弓)이며
을유생(乙酉生)이므로 을을(乙乙)이 되어
임진년(壬辰年) 이여송(李如松)의
송송지설(松松之說)을 방불하게 한다.
앞으로 필제(弼濟)를 도울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이용현(李用玄)이다”
1861년 진천 외면 석현으로 이사했네
목천 등지에서
동지들을 포섭하던 필제(弼濟)는
이웃 마을에 살던
신서방(申書房=충청감사와 친척)과 다투었네
신서방의 밀고로
이필제(李弼濟)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네
풍기로 도피한 필제(弼濟)와
10년 수절 과부 허간(許侃)의 누이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네.
허간(許侃)의 누이는 필제(弼濟)의 소실이 되었네.
1862년 2월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봉기가
삼남(三南)으로 번지자
필제(弼濟)는 풍기를 떠나 조령(鳥嶺)으로 들어갔네.
(4)
1862년(임술년) 6월
남원 은적암(隱寂庵)을 떠나
용담(龍潭)을 향하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조령(鳥嶺)에서 만난 화적(火賊)들에게
동학(東學)의 도(道)를 전했네.
1863년 10월 체포된 최제우가
철종(哲宗)의 승하(昇遐)로 인해
대구감영으로 되돌아온다는 소문이 돌았네.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는
수운 최제우를 배송하기 위해
수백 명의 동학교도들이 조령(鳥嶺)에 모였네.
조령(鳥嶺)에 모인 동학교도들을 보고
감동한 필제(弼濟)는 동학에 입도(入道)했네.
동학에 입도한 필제는
수도(修道)와 포덕(布德)에 열정을 쏟으며
자신의 꿈을 동학에 접목시켰네.
(5)
고종 3년 1월 (1866년)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선포한 대원군(大院君)은
베르뇌, 다블뤼 등 프랑스 신부 9명과
남종삼(南鍾三), 정의배(丁義培) 등
천주교 신자 수천여 명이 체포하여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했네.
1866년 2월 독일인 오페르트는
통상을 목적으로 영국인 모리슨과 함께
영국 상선 로나 호와 엠퍼러 호를 이끌고
상하이를 출항
충청도 해미(海美)의 조금진(調琴津)에 정박하여
두 차례에 걸쳐 입국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네.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通商)을 요구하다 사상자가 발생했네.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화공(火攻)으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네.
프랑스 국적의 신부가 처형되자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군함 7척과 대포 10문 병력 1천명과
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 등 3명을 대동하고
1866년 9월 강화부를 점령했네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전투에서
패전한 로즈제독은
강화부를 철군(撤軍)하면서
조선의 고도서(古圖書) 345권의 문화재와
은괴(銀塊) 19상자를 약탈해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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