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연자시편 - < 아! 안중근(安重根) > - 한국문학신문 5월 25일(제547)

高 山 芝 2022. 5. 27. 15:18

< ! 안중근(安重根) >

 

이로움[] 만나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 만나자 목숨을 걸었네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됨이 없으니

근심과 두려움이 항심(恒心)에 소멸되네

 

용기만 있다고 어진 것이 아니네

 

()가 없는 용기는 사람을 미워하고

()가 없는 용기는 혁명으로 이어지네

 

이념(理念) 앞에서 양심을 속이고

남의 이목 두려워 기망(欺罔)하는 사람들

 

의로움[]을 앞세워 이로움[]을 추구하니

세상을 훔친 도적 의인(義人)으로 각색되네

 

스스로 속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며

스스로 경계하며 스스로 추스르니

 

넘어진 풀꽃들이 일어나 숨을 쉬고

어진 이 앞장 서 의()의 마중물 되었네

 

이로움[] 만나면 의로움[] 생각하고

위태로움 맞서서 생명을 바쳤네

 

(), 불가(不可) 예단 않고

오직 의()만 지향하는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었네.

 

진해현감을 지낸 안인수(安仁壽)의 손자이며 진사 안태훈(安泰勳)의 아들인 안중근은 배에 검은 점이 7개를 갖고 태어나자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았다 하여 응칠(應七)이라 불렀다. 개화당(開化黨)의 일원이던 안태훈(安泰勳)은 갑신정변[1884=고종21]3일천하로 끝나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해서 서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자주 드나들던 포수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서 명사수로 이름이 난 안중근은 동학난[東學亂=1894]이 일어나자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참가했다. 안중근은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은 안중근은 프랑스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운 후 교회의 총대(總代)가 되어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사장을 지냈다. 17세에 결혼하여 21녀를 둔 안중근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상하이[上海]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천주교 신부들의 협조를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귀국한 안중근은 19063, 평안남도 진남포로 거주지를 옮기고 석탄상회를 경영했다. 국민개몽운동에 뜻을 둔 안중근은 석탄회사를 정리하여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고종의 강제퇴위 함께 군대가 해산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한 후, 자신은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 자격으로 안중근은 19086월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한 후,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의병 활동을 재개코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19093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는 맹세를 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 遠東報대동공보 大東共報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을 담당했다. 10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그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자신을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 밝힌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명확히 밝혔다. 일본 측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진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 받을 의무가 없다"면서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일본검찰에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19102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26일 뤼순 감옥에서 주검이 되었다.

 

개화당(開化黨)의 일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안중근은 한말계몽운동에 참여한 후, 의병활동을 통한 폭력투쟁으로 활동영역을 전환했다.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서 안중근은 당시의 세계정세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서양세력이 동양을 침략하는 시기로 인식, 동양의 제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을 극력 방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내건 일본의 러일전쟁 명분은, 올바른 것이었으며 한국이 일본을 지원한 것은 옳은 일로 평가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동양의 평화의 약속을 깨뜨리고, 한국의 국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한국의 원수가 되었으며 이에 한국인들은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 것으로,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하는 길은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나라에 대한 야욕을 버린 뒤 서로 독립한 3국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고 나아가 개화의 역()으로 진보(進步)하여 구주와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했다.

 

< 산포군(山砲軍=동학진압군) 안중근과 동학접주 백범(白凡)의 인연 >

 

이씨 조선이 멸망하고 정도령이 계룡산을 새 도읍지로 삼아 나라를 세운다는 정감록이 세간의 주목을 받던 시절, 16세에 출가하여 동학을 창시(1860)한 최제우(37)는 교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경주에서 체포(1863)되어 대구에서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1864)됐다. 2대 교주 최시형과 동학교도들은 삼례집회(1892), 광화문 상소(18932), 보은의 장내리 집회(18033) 등 세 차례에 걸쳐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1893, 과거에 낙방한 백범[본명 金昌巖, 1892=17]은 동학에 입도하면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했다. 그는 황해도 평안도의 동학당 중 나이가 어리지만 가장 많은 연비[連臂=포교를 한사람] 때문에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1894, 연비 보고를 위해 충청도 보은에 있던 최시형을 찾아간 백범은 최시형을 보필하고 있던 손병희[33, 최시형의 사위 3대교주]와 김연국[37, 최시형의 사위, 손병희와 불화로 시천교(侍天敎) 대선사로 있다가 1925년 신도안에서 상제교(上帝敎)를 창시하여 교주가 됨] 등을 만났다. 백범은 그곳에서 전봉준 주도의 동학농민군 봉기 소식을 듣게 되고 접주(接主)로 임명됐다. 황해도 고향에 돌아온 백범 등 15인의 접주는 죽천장(竹川場)에서 거사할 것을 결의 했다(18949) 팔봉산 아래 살고 있던 백범은 팔봉(八峯)이라는 접명을 짓고 푸른 비단에 팔봉도소(八峯都所)를 쓰고 척왜척양(斥倭斥洋)‘ 넉 자를 써서 내걸었다. 탐관오리와 왜놈들을 죽이고자 해주성(海州城)을 공격하기로 한 동학군의 선봉은 팔봉접주 김창수[백범]였다. 해주성 남문 밖에 매복하고 있던 관군의 총에 동학군 서너 명이 쓰러지자 백범은 퇴각을 명령했다. 황학동으로 퇴각한 백범은 병사훈련에 주력했다. 장덕현과 우종서가 찾아와 군기정숙민심을 얻을 것(동학당이 총을 가지고 마을을 돌며 약탈하지 말 것)“ 등을 건의하자 백범은 이를 즉시 실천했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18세 어린 인재 백범 소식을 듣고 군이 나이는 어리지만 대담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패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는 편지를 백범에게 보냈다. 이에 백범은 참모회의를 열어 "저편에서 이편을 치지 아니하면 이쪽도 저쪽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 서로 도울 것"이라는 데에 합의하였다.

 

구월산에는 이동엽 접주가 이끄는 동학군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동엽의 동학군은 패엽사 부근 촌락을 노략질하다 백범의 동학군에게 붙잡혀서 총기를 빼앗기고 징벌을 받은 후 풀려났다. 백범의 동학군 중에서도 촌락에 내려가 약탈을 일삼다 발각되어 엄벌을 받고 도망가서 이동엽의 부하가 되거나, 아예 도적질을 하고 싶어서 야간에 도주하여 이동엽의 부하가 되는 자들이 늘어났다. 백범이 홍역을 앓고 누어 치료중인 갑오년 섣달[열아홉] 이동엽 동학군이 백범의 동학군을 공격했다. 이동엽의 동학군과 백범의 동학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동엽은 김접주를 손대는 자는 사형에 처 한다고 소리쳤다. 이는 그가 백범을 박해하여 큰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백범을 해월(海月)이 임명한 접주인데 반해 이동엽은 임시방편으로 임종현에게 임명장을 받은 2세 접주였다. 백범의 동학군 중 영장 이용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다. 이 후 백범은 동학과 인연을 끊고 청계동 안태훈 진사에게 몸을 의탁하고 안중근을 만난다. 백범은 청계동에서 두 명의 스승을 얻게 된다.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에게서는 굳은 의지와 넓은 식견을 배우고, 명망이 높은 고능선(高能善)에게 한학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