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정감록(鄭鑑錄)이 만들어 낸 발칙한 봉기꾼 - (제3회)-< 때여! 나의 때여! 동학의 세상이여! > -국보문학 6월 호 2022.07(통권 167호)

高 山 芝 2022. 6. 29. 15:03

국보문학 7월 호

 

< 때여! 나의 때여! 동학의 세상이여! >

 

2부 정감록(鄭鑑錄)이 만들어 낸 발칙한 봉기꾼 - (3)

 

(11)

 

남명(南溟) 조식(曺植)

지리산 덕산(德山) 산천재(山天齋)에서

제자를 양성했네.

 

북인(北人)과 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던

정인홍(鄭仁弘)은 누차의 관직제수를 사양했네

 

합천(陜川)의 향리에 은거(隱居)한 그는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들에게

광해군의 난정을 주도한 인물로 체포되어 처형됐네

 

1728(영조 4) 조식학파의 정희량(鄭希亮)

이인좌(李麟佐)와 손을 잡고 무신란(戊申亂)을 주도했네

 

합천, 진주, 산청 일대에 흩어져 있으면서

조정(朝廷)에 불만을 느낀

유생(儒生)들의 정신적 고향은

덕산에 있는 산천재(山天齋)였네

 

남해 거사에 실패한 이필제는

덕산 시천 장터에서 주점을 하고 있는

영리(營吏) 출신의 정홍철(鄭弘哲)에게 접근했네

 

주석 : 영리(營吏) - 조선시대 감영이나 군영 · 수영에 딸려 있던 아전

 

몰락한 지식인(訓長,儒生)

지리산의 나무꾼이 중심이 된 진주민란은

덕산장터에서 민회(民會)을 개최한

민중들이 진주로 진출하여 진주 병영을 점령하고

우병사(右兵使) 백낙신과 아전을 징계한 사건이네 (1862218일 철종 13)

 

이필제(李弼濟)에게 설득 당한

정홍철(鄭弘哲)의 주막은 이들의 본거지가 되었네.

 

지리산 속에 있는 대원암(大源庵,대원사)

정홍철(鄭弘哲)의 주막을 근거지 삼아

이필제(李弼濟)와 양영렬(楊永烈)은 거사를 계획했네.

 

이필제(李弼濟)는 덕산의 초당(樵黨,나무꾼)을 모아

영부(營府)로 들어가 읍촌을 돌아다니면

군정(軍丁)이 모여들 것으로 생각했네.

 

1870년 경오년(庚午年)이었네

 

정감록(鄭鑑錄)을 인용한 이필제(李弼濟)

경오년(庚午年)은 구실아치가 수령을 죽이는

백마용토사살장사(白馬龍兎吏殺長吏) 운수라고 선동했네

 

정만식(李弼濟)은 고령에 사는

사돈 박만원(朴晩源)을 포섭했네

 

박만원(朴晩源)은 현풍 김희국(金熙國)으로부터

거사자금으로 150량을 염출했네.

 

이 자금으로 선산 심홍택과

거창의 정재영, 정덕원에게 사람을 모집하게 했네

 

자금이 부족하자 부호 조용주, 홍종선에게

격문을 보여 주면서 경오년 운수를 말했지만 거절당했네.

 

정만식과 양영렬은

선비 장경로(張景老)를 찾아가서

시세를 논하고 토호들의 비행을 말하며

동참을 권유했네.

 

210일 덕산약회(德山約會)에서

이필제가 거사계획을 밝혔네

 

“228일 진주병영으로 접수하여

무기와 군사를 빼앗고

주위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여

남해의 금병도에서 군사를 양병하고 양곡을 비축한 뒤에

서울로 쳐들어가서 서양의 도둑들을 쓸어버리고

북벌을 단행해 중국을 점령한다

 

그는 광양민란과 고성민란은

지도자가 없어 성사되지 못했다면서

광양에서 이웃 고을을 서너 개 석권했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네.

 

이필제는 거사의 뜻를 밝힌 격문을 지어 배포했네

 

거사 때에 사용할 기를

의로운 깃발로 작명했네

 

거사에 사용할 조선별지도(朝鮮別地圖)를 준비하고

철편(鐵鞭)과 장검(長劍)을 대원사에 보관하고

정감록의 정씨왕조설의 이미지를 빌려서

정만식을 지도자로 세웠네.

 

이필제와 양성열은

정홍철의 소개로 진주 영리(營吏) 전낙운(全洛雲)

촉석루로 불러내 설득했네.

 

224일 조용주(趙鏞周)의 투서와

전낙운(全洛雲) 고변서(告變書)

진주병영 비장청(裨將廳)에 날아들었네.

 

하동·진주·덕산 등지에 수상한 놈들이

대원암과 덕산 장터를 넘나들며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흉패(凶悖, 험상궂고 패악함)하고

불궤(不軌, 모반을 꾀함)한 말을 떠벌이며

재물을 편취하고 사람을 모은다

 

진주병영은 각 진영과 읍에 비밀 공문을 보내

이들을 잡아들이도록 하자

포졸들은 덕산의 모임 장소인 정홍철의 집을 덮쳤네.

 

이필제와 정덕원 등 4명은 도망가 잡히지 않았네.

 

체포된 연루자들은

경상감영에서 엄한 문초를 받고

서울 의금부로 끌려와 심한 매질 끝에

사실을 실토하면서

모든 일을 이필제에게 떠 넘겼네.

 

심문을 담당한 문사낭청(問事郎廳) 민태호와 김규식에게

추국당상(推鞫堂上)은 사건의 성격을 이렇게 보고했네.

 

주석 : 추국당상(推鞫堂上) - 조선시대에 의금부에서 임금의 특명에 따라 중죄인을 심문하던 벼슬

문사낭청(問事郎廳) - 조선시대에 죄인을 신문할 때 기록과 낭독을 맡아 보던 임시 벼슬

 

이 옥사의 줄거리는 비록 주모자

성칠(性七=朱性祚=李弼濟)이 도망했으나

만식(鄭晩植)이 그 수괴(우두머리),

이하 모든 도둑들은 혈당(血黨, 생사를 같이하는 무리)이요

동조자들이옵니다. 혹 요언 · 참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흉서 · 흉찰을 돌리기도 했사옵니다.

남해에 어사 출두하려 꾸민 꾀는

재산을 빼앗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며

덕산에서 장정을 모으려는 꾀는

그들 뜻이 장차 병란을 일으키려 한 것이옵니다.” - 추안급국안

 

고종은 주모자 이필제가 도망간 사건에서

 

공범 또는 종범 만을 중죄로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

정만식과 양영렬 등 12명을 죽을죄에서 한 등급을 감해서

추자도·흑산도 등지로 귀양을 보냈네.

 

(12)

 

18643월 비밀리에 유시가 담긴

수운(水雲)의 담뱃대를 전해 받은 해월(海月) 최시형은

김춘발(金春發)과 함께 태백산으로 도피했네

 

10월 경 태백산을 하산한 이들은

이무중(李武仲)의 집을 거쳐

평해군(平海郡) 황주일의 집에서 집신으로 생계를 유지했네.

 

의탁할 곳이 없어 유리하던

수운(水雲)의 가족들이 해월(海月)을 찾아왔네

 

버섯발로 뛰어나온 해월(海月)

박씨 사모와 두 아들 세정, 세청을 영접했네.

 

18651월 해월(海月)

자신의 가족과 수운(水雲)의 가족을 데리고

울진군 죽변리(竹邊里)로 이사해 함께 생활했네

 

죽변에 은거한 해월(海月)은 두문불출하고

치성과 공부에 힘을 쏟으면서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각처에 사람을 보내어 조직을 정비했네

 

49일 기도를 1 년 동안 네 차례 드렸으며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복사하여 각처의 접주에게 보냈네

 

186510월 수운(水雲)의 탄신(誕辰) 향례(饗禮)

검곡(劍谷)에서 거행한 해월(海月)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으니라

사람이 인위로 귀천을 가리는 것은

곧 천의(天意)를 어기는 것이니

일체의 귀천(貴賤) 차별을 철폐하라

 

는 적서(嫡庶) 차별 금지를 선포했네

 

18672월 울진군 죽변리에서

예천군 수산리로 거주지를 옮긴 해월(海月)

박씨 사모와 수운(水雲)의 두 아들의

연루(連累)의 화()를 우려

상주의 동관암(東關岩)으로 옮겼네.

 

박씨 사모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네

문득 정신이 황홀해지더니

 

너에게 대도(大道)의 중한 짐을 지게 한 것은

오직 하늘의 뜻이니,

네가 비록 용납을 받지 못할지라도

괴롭게 생각하지 말라

하늘의 계산이 스스로 있으니

너는 노력하여 도()의 기초를 세우라

 

라는 소리가 들렸네

정신을 차려 사방을 바라보니

하늘은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숲 속의 바람소리, 계곡의 물소리만 들렸네

 

(13)

 

18671028

흥해(興海)의 전광무(全光武) 집에서

수운(水雲)의 조난향례(遭難享禮) 마치고

해월(海月)은 양천주(養天主)에 대한 설법을 행했네.

 

내 핏덩어리가 아니거늘

어찌 시비하는 마음이 없으리오 마는

만일 혈기를 생하면 도()를 상하게 하므로

내 이를 하지 아니하노라.

 

나도 역시 오장(五臟)이 있거늘

어찌 탐욕(貪慾)이 없으리오 마는

내 이를 하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모시고 기르는 연고니라

 

내 비록 부인과 어린이 말이라도

배울 것은 배우고 따를 것은 따르나니

모든 선()을 하늘의 말로 아는 믿음이라

 

여러분이 스스로 높이는 행위는 가탄(可嘆)스럽노라

 

나 또한 세상 사람이니

어찌 이런 마음이 없으리오 마는

내 이를 하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모시고 기르는 연고니라

 

교만과 사치의 마음이 어떤 이득이 있는가

교만이 많으면 사람을 잃고

사치가 많으면 진실을 잃어버리나니

 

사람을 잃은 것은 세상을 버림이요

진실을 잃은 것은 자아(自我)를 버림이니

이 두 가지를 잃고 도()를 구하는 자는

종자를 버리고 곡식을 구하는 자와 같다

 

그러므로 내 평생 외식(外飾)을 피하고

내실을 기하는 것은

한울님을 모시고 기르는 연고니라

 

여간한 개심(改心)에 스스로 자족하는 사람은

때 이른 과실의 조숙함과 같네

 

그러함을 아는 사람과

그러함을 깨닫는 사람은 수준이 서로 같지 않네

 

시천주(侍天主)의 본뜻을

입으로 말하며 글로 그리지 말고

먼저 만심쾌재(滿心快哉)하여

그 마음이 기쁨과 감격으로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를 아는 사람이라 할 것이네

 

마음이 바뀌면

천하에 별 사람이 없는 것을 알게 되네

 

내 어릴 적에는 옛 성인들은

사람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대 선생을 따라 마음을 배운 뒤 성인들도 사람이며

우리와 다른 점은 마음이네

 

마음에 한울님을 모시고 기르면

한울님과 사람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네

 

18683월 영양 일월산 기슭

죽현리(竹峴里) 용화동(龍化洞) 대치로 거주지를 옮긴

해월(海月)은 짚신을 삼으면서 수도에 전념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