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가슴에 품고 >
이익(利益)을 따라가는
도적들 틈에서
이름을 걸었네
고난(苦難)을 선택했네
안일(安逸)을 따라가는
필부를 틈에서
목숨을 걸었네
대의(大義)를 선택했네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가슴에 품고
피앗골 물들인 녹천(鹿川) 기상이여
선혈 낭자한 그 충정(忠情)
넋이 되어 떠도는데
검붉은 동백
연곡사(鷰谷寺)에 피었네
호남의 명문 장흥(長興) 고(高) 씨는 삼부자(三父子) 불천위(不遷位)로 유명한 충절(忠節)의 집안이다. 금산성(錦山城) 전투에서 고경명(高敬命)이 이끄는 의병(義兵)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패했으나 왜군(倭軍)의 예기(銳氣)를 꺾음으로써 전주성(全州城) 점령을 좌절시켜 호남 곡창을 보전할 수 있었다. 1593년 7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 군량을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는 뜻의 '국가군저개고호남(國家軍儲皆靠湖南)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말씀을 남겠다.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은 고경명의 차자(次子)인 학봉(鶴峰)의 봉사손(奉祀孫)이다. 어려서 외조부에게 학문을 배운 그가 종가(宗家)의 양자로 가게 되자, 외조부는 “외손들 가운데 제일뽑이를 빼앗겼다”며 아쉬워했다.
상월정(上月亭)에서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한 고광순은 비리와 부정이 난무하던 과장(科場)의 실태를 목도하고 과거를 포기하고 일제 침략세력과 권세가들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혼란한 시국상황을 개탄하고 울분의 나날을 보냈다. 왜놈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자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1895년, 11월 17일(음)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고광순은 기우만(奇宇萬), 기삼연(奇參衍) 등과 함께 연락을 취하며 각 고을로 격문을 전파하면서 처음으로 의병 규합에 나섰다. 1896년 2월(음) 광주와 나주 등지에서 의병 규합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게 되자, 기우만을 주축으로 광주향교에 집결해 규칙을 정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숙의하였다.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등과 함께 나주로 가, 주서(注書) 이학상(李鶴相)의 나주 의병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광주, 나주, 담양 등지에서 규합된 의병은 기우만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2월 30일 광주를 본부로 삼아 집결토록 하였다. 그러나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이 내려와 해산을 명하자, 항거할 명분이 사라져 의진(義陣)을 자진 해산한다. 임금의 명령인지라 의진(義陣)을 해산했지만, 그 명이 적신(賊臣)들의 협박 때문에 내린 것임을 알고 있는 고광순과 기우만 등은 비분강개하여 각지를 전전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고광순(高光洵)이 그의 평생 동지인 무인 기질을 타고난 고제량(高濟亮)과 나눈 대화이다.
“왜적들이 나라를 삼키려 하는데 그대 같은 유술(儒術)을 장차 어디다 쓴단 말인가?”
“서생의 가슴 속에는 저절로 갑병(甲兵)이 들어있는 법이니 그대와 같은 호기(豪氣)는 다만 한 모퉁이를 감당할 뿐이외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모인 의병을 최익현(崔益鉉)이 이끌고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에 고광순과 고재량이 달려갔으나, 최익현과 참모들은 남원과 전주에서 출동한 진위대(鎭衛隊)에 의해 체포된 뒤였다.
1905년 11월 고광순은 광양 백낙구(白樂九), 장성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구례 중대사(中大寺)에 모였다. 백낙구(白樂九)는 동학농민전쟁 때 초토관(招討官)으로 실전의 경험이 있었다. 백낙구는 전남 광양 산중에 은거하던 중 동지 10여 명과 수백 명의 주민을 모아 의진(義陣)을 편성했으나,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한 날 모인 군세가 미약하여 백낙구(白樂九) 등이 체포되었다.
이 후 광무황제(고종)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 애통조(哀痛詔) >를 받고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맹약한 고광순은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 5백여 명과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 모여 의진(義陣)을 결성한 후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고광순 의진(義陣)은 남원의 양한규(梁漢奎)로부터 남원읍 공략을 위한 연합작전 제의를 받고 남원으로 향하던 중 양한규 의진(義陣)이 와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홍치(飛鴻峙)를 넘어 담양군 평창으로 회군하였다.
고광순 의진(義陣)은 능주 양회일(梁會一), 장성 기삼연 등과 힘을 합해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고 전전하였다. 1907년 4월 25일에는 화순읍을 점령, 평소 원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 호를 소각했다. 다음날 다시 동복으로 진군한 의진(義陣)은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교전한 끝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제는 고광순을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추적을 계속했다. 1907년 9월 고광순(高光洵)은 의병활동에 ‘축예지계’(蓄銳之計)를 선택했다. 일제 군경과 임기응변식의 즉흥적인 전투방식을 탈피,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추는 계략이었다. 그는 지리산을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로 판단했다.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피아골을 택했다.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엔 화개동(花開洞), 서쪽으로 구례, 그리고 북쪽에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험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더없이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두루 갖춘 피아골 연곡사(鷰谷寺)에 본진을 설치하고, 민간인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강력한 일제의 군경과 맞설 만큼의 전력을 축적하고자 했다.
1907년 9월 11일 고광순은 전열을 정비하고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후 곡성군 구룡산(九龍山) 아래에 당도하였다. 진용을 강화한 고광순 의병은 지리산으로 입산하기 전에 동복을 공략키로 하였다. 동복은 오래된 군현으로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의 처척(妻戚)관계로 정치적으로는 얼룩진 고장이지만 보성에서 남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이자 산중 도회지였다. 북쪽 옹성산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자연동굴이 많고 동쪽 운월산도 순천과 경계되어 있어 점령만 하면 이점이 많은 곳이었다. 고광순 의진(義陣)은 9월 15일 새벽에 헌병분견소를 공격했다. 그러나 일제 군경의 반격으로 도포사(都炮士) 박화중(朴化中)이 전사하는 등 고전했다. 당시 전투상황에 대해 일제 측 정보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9월 15일 오전 6시 폭도(의병: 필자주) 약 60명이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보조원 2명이 교 전했으나 중과부적이라 광주로 철수하였다. 미야가와(宮川) 보좌관은 보좌관 6명, 순검 1명을 이끌고 특무조장 1명, 병졸 7명과 협력, 토벌했으나 적은 시체 한 구를 버리고 도주한 뒤였 다.” (전남폭도사)
고광순은 그 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선봉장 고광수의 집이 있는 남원군 이백면 효기리에 숙영한 다음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갔다. 고광순 의병이 화개동을 지나 피아골 계곡 아래에 자리 잡은 연곡사(鷰谷寺)에 도착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신라 진흥왕 4년(543년)에 창건한 이 절은 임진왜란 때 한 번 불탔으나 그 뒤 다시 중수했다. 고광순은 연곡사를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기치로 세우고서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추어 갔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의 표상이었다.
충남 회덕 출신의 김동신(金東臣)은 무주 덕유산과 정읍의 내장산, 그리고 장성의 백양사 등지를 주로 전전하며 기우만, 고광순과 연락하며 의병 활동을 벌렸다. 전북 순창읍의 우편취급소 및 분파소를 습격하고 구례군 토지면 문수골에 있는 문수암으로 들어온 김동신(金東臣) 의병을 추격하던 일제 군경이 문수암에 도착했을 때는 김동신은 다른 곳으로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에 일제 군경은 문수암을 불태우고 화개동에 주둔했다. 화개동은 연곡사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연곡사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화개동을 일제 군경이 장악하게 되면, 영남지방 의병과의 연락이 끊기게 되므로 고광순 의병이 활동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게 될 수밖에 없었다. 고광순 휘하의 윤영기와 고광수가 주축이 되어 10월 9일 화개동의 일제 군경을 기습하러 출동하였으나 일제 군경은 화개동에서 쌍계사로 모든 화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지리산이 영, 호남 의병의 본거지로 변모하자, 일제 군경은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고 대대적인 탄압작전에 돌입했다.
진해만의 중포대대(重砲大隊)에서 파견된 소대 병력, 광주에서 출동한 1개 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의 순경 등으로 의병 측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고광순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 이에 부장 고제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죽음을 함께 할 것을 맹약하였다. “당초 의(義)로써 함께 일어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는가!” 일제 군경은 총공격을 가하며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다. 의병도 만만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화승총 심지에 불을 붙여 완강히 저항했다.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25~6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일제는 연곡사가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서 이용될 수 없도록 연곡사 안팎을 모두 불사르고 퇴각하였다.
고광순이 순국한 지 며칠이 지나서 우국시인이자 당대의 기록자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연곡사를 찾아갔다. 그는 고광순 무덤의 봉분을 돌보면서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추모 시 한편을 남겼다.
연곡(鷰谷)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 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연곡사(鷰谷寺) 교전 직후에, 어느 한 농부가 고광순과 고제량의 시신이 불에 타지 않도록 채마밭에 옮겨 솔가지로 덮어두었다. 나흘 뒤에는 고광훈이 상포(喪布)를 준비해 가지고 연곡사 터를 찾아 솔가지로 덮어둔 두 의사의 시신을 절 부근에 임시로 묻고 봉분을 만들어 놓았다. 황현이 연곡사를 찾았던 것은 임시 성분(成墳)한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이렇게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두 의사의 유해는 창평(고광순)과 화순(고제량)의 향리로 옮겨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광순의 부인 오 씨는 남편이 순국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 창평 향리 뒷산에 묻혔으며, 장자 재환은 벙어리로 3년 뒤에 죽었고, 차남 역시 장가도 들기 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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