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연자시편 - < 성주풀이 * 2 > - 한국문학신문 8월 24일(제558)

高 山 芝 2022. 8. 29. 17:31

< 성주풀이 * 2 >

붉은 비늘

갑옷 입고 토하는 용트름

 

맑은 기개

속기(俗氣)가 없어

 

하늘과 땅 이어주네

 

아침 햇살 받은

상서로운 기운

 

청량한 바람에 흔들리네

 

허기진 자 솔잎 씹어

배를 채우고

 

솔가리 땔감으로 몸을 뎁히네

 

솔나무 몸체로

집을 지으면

 

부러울 게 없네

세상이 내 것이네

- 졸시 < 소나무 >

 

천지가 개벽하였다.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땅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났다. 인황씨(人皇氏)가 다시 태어나 그 형제 아홉이 세상을 아홉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천궁대왕과 옥진부인은 마흔 살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큰 산과 강에서 치성을 드렸는데 꿈에 도솔천궁의 왕이 나타나 아들을 주겠으니 이름은 안심국, 별호는 성주라고 지으라 하였다. 태어난 아들은 남달리 영특하여 열다섯 살에 세상 이치를 꿰뚫어 알았다. 어느 날 땅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이 집도 없이 수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성주는 사람들에게 나무를 베어 집짓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어 지상에 내려와 보니, 세상의 나무 대부분은 산신(山神)과 당신(堂神)의 차지였다. 나머지도 까치와 까마귀들이 깃을 틀고 있어서 벨만한 나무가 없었다. 하늘로 올라간 성주는 옥황상제(玉皇上帝)께 아뢰었다. 그의 뜻을 갸륵하게 여긴 옥황상제는 제석궁(帝釋宮)에게 솔씨 서말 닷되 칠홉 오작을 주라고 일렀다. 성주는 솔씨를 주인이 없는 민둥산에 뿌려놓고 되돌아갔다.

 

열여덟이 되었을 성주는 황회궁의 계화(桂花)공주와 결혼했으나 간신의 모함을 받아 무인도인 황토섬으로 귀양을 갔다. 3년의 기한이 지나고 4년째 접어들어도 돌아오라는 소식이 없었다. 옷도 헤지고 양식도 떨어졌다. 산나물과 소나무 껍질을 먹으며 연명한 성주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청조(靑鳥)를 발견한 성주는 무명지를 깨물어 피로 쓴 편지를 청조(靑鳥)의 다리에 매어 날려 보냈다. 편지를 받은 계화공주, 천궁대왕과 옥진부인도 눈물을 흘렸다. 고국으로 돌아온 성주는 55녀를 두었다. 일흔 살이 되었을 때, 솔 씨를 심은 것이 생각나서 자식들을 모두 데리고 땅으로 내려왔다. 나무는 어느덧 아름드리로 자라나 있었다. 그는 자식들을 거느리고 냇가로 나가 쪽박과 함지박으로 모래를 퍼서 쇠를 일었다. 처음에는 사철뿐이었다. 두 번째는 상철 다섯 말과 중철 다섯 말이 나와서 풀무를 만들었다. 그리고 도끼, , , 송곳, 대패, 괭이, 호미, 낫과 같은 온갖 연장을 벼렸다.

 

성주는 연장으로 나무를 베고 다듬어서 집을 지었다. 집짓기를 끝낸 후 성주는 입주 성주신이 되고 계화공주는 몸 주 성주신이 되었다. 아들 다섯은 오토지신(五土之神)이 딸 다섯은 오방부인(五方夫人)이 되어 가정을 수호하는 수호신이 되었다.

 

경상북도 안동 제비원을 배경으로 한 성주풀이도 재미있다.

 

성주대신 지신아. 성주 고향이 어디 메냐

경상도 안동 땅에 제비원의 솔씨 받아

소평 대평 던졌더니 그 솔 씨가 자라나서

밤이 되면 이슬 맞고 낮이 되면 태양 맞아

그 솔 씨가 자라나서 소보동이 되었구나

소보동이 자라나서 대보동이 되었구나

그 재목들 자라나서 왕장목이 되었구나

 

그 재목들 데려갈 제 서른세 명 역군들아

옥도끼를 둘러메고 서산에 올라 서목 메고

대산에 올라 대목 메고 이 집 돌 안에 재여 놓고

일자대목 다 모아서 굽은 놈은 등을 치고

곧은 놈은 사모 맞차 하개 서개 터를 닦아

초가삼간 집을 짓고 사모에 핑경 달고

동남풍이 피리 불며 핑경 소리 요란하다

 

아따 그 집 잘 지었다 그것 모도 거기 두고

시간 살이 논 도만 석, 밭도 만석

해마다 춘추로 부라 주자

묵고 씨고 남는 것은 없는 사람 객을 주자.

 

설화의 내용은 비슷하지만, 안동에는 실제로 제비원이 있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인 안동 이천동 석불상의 주변 지역으로 이곳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했다가 조선시대에 폐사된 연미사(燕尾寺)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은 ()’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원들을 위해 국가가 설치한 숙박시설을 말하는데, 사찰에서도 원()을 운영한 바 있다. 당시에는 연비원(燕飛院)’으로 불리다가 훗날 제비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옛날에는 경상도에서 충청도·경기도로 가려면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있던 것이 제비원이었다.

 

제비원은 성주풀이라는 민요를 통해 집을 관장하는 가택신(家宅神)인 성주(城主)의 본향으로 설정된 곳이다. 옛 조상들은 집안의 무사태평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또 집을 새로 지었거나 이사를 했을 때 성주신을 모시는 성주굿을 벌였다. 성주굿을 하기 전에 산신제부터 드렸다. 솔이 점점 자라 재목감이 되면 그 중에서 자손 번창과 부귀공명을 누리게 해 줄 성주목을 고른다. 성주목은 산신님이 불을 끄고 용왕님이 물을 주어 키운 나무이므로 함부로 베지 못하고 날을 받아 갖은 제물로 산신제를 올린 후에 베어내어 다듬어서 집을 지었다. 성주굿에서 무당이 부르던 무가(巫歌)가 민간에 퍼져 민요화된 것이 성주풀이이다. ‘성주풀이가사 중에는 성주야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원이 본이 되야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현재 제비원에는 솔씨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근처에는 1934년 옛 절터에 새롭게 세운 사찰 연미사(燕尾寺)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