霽峯 고경명 누정제영 유명 | ||||||||||||
| ||||||||||||
귀래정(歸來亭)의 누정제영(樓亭題詠)에는 네 사람의 누정시가 전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 금산(錦山)에서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고경명 의병장의 누정시가 남겨져 있다. 고경명은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에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한 인물로 문장과 시, 글씨 등이 뛰어나서 여러 곳의 누정에서 그의 시(詩)를 볼 수 있다. 『제봉집(霽峯集)』에 전하는 그의 누정제영을 보면 북으로는 평안도 대동강변의 연광정 (練光亭), 청주강변의 백상루(百祥樓)로부터 남으로는 전남 영암의 서호정(西湖亭)과 담양의 식영정(息影亭)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누정에 찾아가 시를 제작한 누정의 수만도 40개소가 넘는다.
그는 심지어 중국의 비궁정(閟宮亭)과 비파정 (琵琶亭), 패능정(㶚陵亭) 등의 고사를 염두하여 ‘정(亭)’자음을 써저 ‘유감용정운(有感用亭韻)’, 또는 ‘월야문필유감용정운(月夜聞筆有感用亭韻)’ 등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명류시인들에게는 대부분 누정제영이 많아서 그들을 누정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霽峯 은 그 중에서도 손꼽아야할 인물이다. 특히 霽峯의 누정제영에는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송순(宋純)의 면앙정(俛仰亭), 또 담양 남면 지곡리에 있는 석천(石川)의 식영정에서 지은 그의 누정시는 우리나라 누정문학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그의 제영 중 ‘면앙정삼십영(俛仰亭三十詠)’은 면앙정을 중심으로 원근으로 펼쳐진 자연풍경의 30가지를 노래한 장편의 연작시이다. 송순의 면앙집에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제봉(霽峯), 고경명, 사암(思菴) 박순(朴淳) 등 명사들이 이 면앙정삼십경(俛仰亭三十景을) 노래한 면앙정제영 (俛仰亭題詠)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고경명의 삼십영(三十詠)이다. 옛날 뭇 소나무 손수 심었더니, 푸르게 자라서 구름에 닿는구나. 이 시는 霽峯이 면앙정의 30경 중 몽선창송(夢仙蒼松)을 두고 지은 오언절(五言絶)이다. 면앙정에서 바라보는 이 근원의 산을 들면 이 몽선산을 비롯하여 추월산, 용구산, 불대산, 용진산, 어등산, 금성산 등이 있고, 면앙정삼십영(俛仰亭三十詠)은 이 같은 산의 풍경을 하나씩 오언절(五言絶)로 노래하였는데, 우리나라 누정시사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송순의 면앙정가에도 이들 산에 대한 서술(敍述)이 나타나 있다. 霽峯의 누정제영에는 면앙정삼십영과 쌍벽(双壁)을 이루는 누정시로 식영정이십영이 있다. 霽峯은 당시 석천(石川) 임억영(林億齡) 과 김성원, 송강 정철 등과 함께 성산동 사선 (四仙)으로 알려진 식영정시단의 중심인물이다. 사선 중 석천 외의 세 사람은 석천에게서 시를 배우며 석천의 원음(原音)에 근차(謹次)하여 각각 식영정제영을 이룬 것이다. 송강이 제작한 성산별곡은 바로 이들의 식영정이십영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래서 송강의 성산별곡은 누정문학의 하나로서 식영정별곡, 또는 식영정가라고 이를 만한 것이다. 霽峯은 이 이십영 외에도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 식영정사시영화고봉(息影亭四時詠和高峯)을 제작하는 등 많은 식영정제영을 남겼다. 따라서 식영정이십영 역시 식영정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는 원근(遠近)의 자연이십경을 노래한 것이다. 이 중 식영정 앞에 흐르는 창계(蒼溪)에 있는 노고암(爐高岩)에 대한 霽峯의 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지는 해는 노고암에 비추는데, 푸른 바위 더펄새의 젖은 날개 말리는 곳 | ||||||||||||
| ||||||||||||
청계정사(靑溪精舍) 2km 쯤 따라가다 보면 순자강 남쪽 강가에 계곡 입구가 보인다. 곡성읍의 주산인 동악산과 남원시의 고리봉 사이를 흐르는 순자강은 수려한 송림과 강바닥의 수많은 바위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별천지와 같은 이곳을 옛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내왕하던 곳이다. 김장생 등과 교유하였다. 것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백무동→하동바위 →장터목(제석당)→천왕봉을 답사하였다. 부리는 가동 50명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6월에는 고경명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고 유학 유팽로와 함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전주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하기도 하였으며, 진산 전투에서 과로로 진중에서 죽었다. 담장에는 댕댕이 넝쿨이 무성하다. 구름이 머물고, 바람과 뇌우는 계곡물의 근원을 이루니 신선이 살 만한 곳이다. 밤에 아궁이에 지피는 불빛이 마치 산도깨비가 밤중에 금 솥 불을 엿보는 것 같다. 가을 물새는 쌀쌀한 가을밤에 훈훈한 굴뚝 연기 속에 잠이 드는구나. 사람들은 흔히 헛된 생각에 빠지기 쉬우니 신선의 계곡에서 몸소 체험을 하며 깨달아야 한다. 바로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 아닌가. 기암괴석이 봉우리를 이루고 아득히 구름이 떠가는 심산유곡이다. 달빛이 반짝이는 시냇물은 금물결을 이룬다. 고요한 분위기에 그래도 속세의 때를 다 벗지 못하였던지 은근한 훈풍에 옛날 살던 속세의 냄새가 실려 온다. 그 시절은 고기 안주에 술이 넘쳐 마음껏 취하던 때였지. 앞에서 나를 반기는 주인은 용모가 마치 속세를 떠난 신선을 보는 듯하다. 먼 곳 애써 찾아온 이곳이 바로 선계가 아닌가. 풍로에는 신선이 피우는 온기만 남아 있고, 아침 이슬은 햇살에 날아가 흔적만 남았다. 인생의 덧없음이 이와 같으니 느긋이 거룻배 타고 노닐며 그대와 술잔이나 나누고자 한다. 급제하였다.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전적·정언을 거쳐 사가독서 하였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낙향하였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에서 6,000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종사관에 유팽로·안영·양대박, 모량유사에 최상중·양사형·양희적을 각각 임명하는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왜적과 싸우다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늦었는지 하늘에는 벌써 밝은 달이 떠오르고, 먼저 온 손님들이 노닐던 강가 빈배에는 아직도 시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순자강 물위에는 꽃잎이 흐르니 무릉도원이 분명하구나. 산 위 하늘에는 신선이 노닌 자취는 찾아볼 수 없으나 강가 모래밭에는 낮에 날아온 학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하룻밤을 묵고 나니 어느새 신선이 된 것 같다.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술을 내어 오라 이르게나. 우리 신선처럼 고고하게 술이나 한잔하며 다시 한번 흥취를 느껴 보세. 하였다. 7년 후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선조 7년 11월부터 선조 8년 3월까지 5개월 동안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바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기대승과 절친하였다.
|
![]() |
'나의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사람의 이야기 - 고 경 명 (0) | 2011.05.31 |
---|---|
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⑩/ 霽峯 高敬命 (0) | 2011.05.30 |
고 경 명(高敬命)과 유 팽 노(柳彭老) (0) | 2011.05.30 |
고경명의 詩 - 立 馬 沙 頭 別 - (0) | 2011.05.30 |
[ 고경명(高敬命)의 시조 "청사검을 둘러메고" ] (0) | 2011.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