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고 경 명(高敬命)과 유 팽 노(柳彭老)

高 山 芝 2011. 5. 30. 16:34

☞ 고경명[高敬命]

제목 : 고경명[高敬命]
주소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947-1
분류 : 충효


광주를 의향(義鄕)이라고 한다. 이는 국가와 국왕에게 충절을 다하고 올바른 일을 행하는 의리를 지닌 인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국가의 위기에 개인의 신명을 다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인리민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외적이 침범하여 질서체계가 무너지고 백성들의 삶이 위기에 몰렸을 때 국가와 백성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충절과 의리를 다한 인물들이 허다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왜군을 일선에서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이 “호남은 국가를 보장한다(湖南國家之保障)”고 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 싸운 광주의 대표적 인물이 고경명이었다.
고경명(1533 ~ 1592)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제봉(霽峰) 태헌(苔軒),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기묘명현으로 형조좌랑 운(雲), 아버지는 대사간(大司諫) 맹영(孟英)이었다. 고경명은 1533년(중종 28년) 광주 압보촌에서 출생하여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558년(명종 13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공조좌랑,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는 1563년 교리(校理)로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하였다. 이양은 홍문관의 탄핵으로 결국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 그는 장인 김백균에게 이량의 전횡을 탄핵하는 경위를 알려줬다. 그의 장인 김백균과 그의 부 고맹영은 이량의 당인이었다. 이량은 자신에 대한 탄핵의 경위를 알게되었다. 결국 고경명은 이량에 대한 탄핵에 참여한 것이 문제가 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고경명은 18년 동안 고향에서 머물며 문인들과 어울렸다. 그가 어울렸던 인물들은 다양하다. 특히 김인후 기대승 정철 등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식영정에서 보고, 보이는 풍경들을 시제로 삼아 시를 남겼다. 식영정 20영이 그러하다. 그는 식영정의 풍경을 읊은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문장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 많은 시를 남겼다. 또 그는 무등산을 기행하고 문장을 남겼는데 『유서석록(遊瑞石錄)』이 바로 그것이다.
고경명은 1581년(선조 14년) 영암군수로 다시 관직에 진출하였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金繼輝)의 서장관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그 다음해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 이이(李珥)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는 이어서 평양 서윤(庶尹), 한산군수를 역임하였다. 그가 1591년 동래부사 재직 중 간관(諫官)들이 정철을 탄핵 유배시켰고 이를 계기로 정철을 선발한 고경명을 배척하였다. 이에 그는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그의 낙향에는 당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영향을 미쳤다. 고경명은 선조대 동 서인의 분화와 갈등 속에서 서인이었고 이이 정철 조헌 윤두수 백광훈 양대박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량의 당인에 속하였다. 이로 인해 고경명은 동인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고경명은 지방관으로 나가있을 때 종종 업무처리와 관련하여 비판을 받았다. 즉 사리에 어둡고 이사(吏事)에 익숙하지 못하다거나 천성이 본래 소탈하여 부임한 이후로 책임의 중대함을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술 마시는 것을 일로 삼아 직무를 전폐하였다는 등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왜군이 동래성을 함락 한 후 북상하여 경성(京城 즉 한양)을 침입하였다. 이때 그는 전라감사 이광에게 군대를 일으켜 왜군을 막으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회재 박광옥과 함께 의병봉기를 논의하였고 두 아들(종후 인후)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가 목사 정윤우에게 군대를 보내주었다. 고경명은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이 의진이 호남연합의병이다. 고경명은 맹주로 추대되었고 유팽로와 안영, 양대박 은 종사관이 되었다. 최상중 양희적 양사형이 모량유사로 활동하였다. 고경명은 30일만에 6000명의 의병을 모아 의병군을 편성하였다. 그는 의병군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해 전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대열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국운이 비색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령이나 관군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도망치기 일쑤니 어찌된 일인가. 신하로서 왕을 잔학한 왜적 앞에 내버려둔단 말인가. 각 읍의 관군 수령 민중들이여 무기를 들고 군량을 모으며 모두 분연히 일어설 때다. 구국을 위해 다 함께 목숨을 걸고 앞을 다투어 나설 줄로 믿는다.

고경명은 관군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백성들에게 충절과 의리를 강조하여 의병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전주에서 북상을 계속하여 여산, 은진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왜군이 금산에서 전주를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고경명은 전주는 호남의 근본인데 먼저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본 도부터 구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왜군의 전주로 가는 진출로를 차단하기 위해 금산으로 갔다.
고경명은 금산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전서를 보내 왜군을 함께 격퇴하자고 제안하였다. 첫날 고경명은 선봉대를 앞세워 왜군을 공격했지만 군장 김정립의 말이 부상당하자 후퇴하였다. 그 날 저녁 왜군이 잠든 후 용맹한 군사 30여명을 성 아래에 잠복시킨 뒤 성밖에 사가를 모두 불태워 서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다음날 곽영(郭嶸)이 지휘한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먼저 관군이 왜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무너지자 의병도 패배하였다. 이때 유팽로가 고경명에게 피할 것을 권했으나 고경명은 이를 거부하고 적과 싸우다가 선봉장 유팽로, 후군장 안영, 고인후와 함께 순절하였다. 비록 고경명의 의병부대는 왜군을 격퇴시키는데 실패하였지만 왜군도 그 피해가 적지 않았다. 왜군은 금산전투 이후 호남 진입을 포기하고 경상도로 후퇴하였다.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의 순절이후 호남 지방에 의병봉기가 연이어 이어졌다. 고경명의 큰아들 종후가 의병을 일으켰고 능주에서는 최경회가 전라우의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을 중심으로 해 전라좌의병을 일으켰다. 남원에서는 변사정이 주도하여 의병이 일어났다.
한편 고경명의 거의 소식을 접한 선조는 고경명에게 공조참의를 내려주고 초토사(招討使)를 삼았다. 그러면서 선조는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길르 바란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선조의 고경명에 대한 기대는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이 패배함으로써 이루지지 못하였다.
고경명의 충열과 의에 대한 평가는 선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명은 문학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숙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공은 성취하지 못하였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백성들이 그의 충렬을 칭송하며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고경명의 의병봉기와 그 충성심을 칭송하였다.
고경명은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는 광주의 포충사(表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고경명의 일가는 임진왜란시에 의병대열에 참가하였다. 그의 동생 경신(敬身)은 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러 제주도에 갔다 오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했다. 또 그의 다른 동생 경형(敬兄)은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 고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는 32세로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그리고 그의 큰아들 종후(40세)는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숙부 경형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의 막내아들 청사(晴沙) 용후(用厚)도 아버지를 따라 의병부대에 합류하러 하자 고경명은 “너는 나이도 어리고(당시 16세), 집안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타일러 집에 머물게 하였다.
고용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가문의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여 후세에 남겼다. 무청사(無晴沙)면 무제봉(無霽峯) 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고경명의 막내아들이 있었기에 고경명의 문집과 행적이 세상에 알려졌다는 의미이다. 고경명의 유고집으로 『제봉집(霽峯集)』, 『제봉속집(霽峯續集)』 『제봉유집(霽峯遺集)』 『유서석록(遊瑞石錄)』 『정기록(정기록)』이 있다. 정기록은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킨 후 각 지방에 보낸 격문과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 유팽로[柳彭老]

제목 : 유팽로[柳彭老]
주소 :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48
분류 : 충효


유팽로(1564 ~ 1592)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숙(亨叔) 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이다. 유팽로의 아버지 경안(景顔)은 진사를 거쳐 충주판관에 올랐으나 을사사화 때 사직하고 합강촌에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그는 정자를 짓고 생활하며 스스로 합강거사라 하였다. 그는 김인후(金仁厚)가 옥과현감으로 부임하여 자신의 집을 자주 방문하자 그와 치민의 도리를 상론(相論)하며 하서 김인후에게 청근(淸勤)을 치민의 요체로 삼을 것을 요청하였다.
유팽로는 어려서 집안에서 글을 배웠으며 문장에 재주가 있었다. 그가 6세에 지은 시가 있는데,

前有合江水 앞에는 합강물이 있고
後有玉出山 뒤에는 옥출산이 있으니
願借江山壽 원컨대 강과 산의 수명을 빌려
但欲悅親顔 어버이의 얼굴을 기쁘게 받들었으면

이라 하여 어버이에 대한 사랑을 읊었다. 그는 복재(復齋) 오수성(吳遂性)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6세(1579년, 선조 12년)에 진사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는 1588년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그 다음해에 홍문관(弘文館) 부정자(副正字)로 관직에 나갔다. 그는 한준겸(韓浚謙) 정경세(鄭經世)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유팽로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부친이 병석에 눕게되어 부친 봉양을 위해 걸양소(乞養疏)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는 1592년 4월 홍문관 박사로 다시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3차례에 걸쳐 시폐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관료들이 일신을 보전하기 위해 급급한 현실을 비판하고 군주가 진성수덕(진성수덕)을 몸소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직간를 선조는 싫어하였고 동인들을 그를 폄하하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정철 윤근수 등의 서인계 인사들이 유팽로를 옹호하였다. 그 결과 유팽로는 처벌받지 않고 그 대신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로 좌천되었다. 유팽로는 진주판관 김시민의 아들 김치(金緻)로부터 왜군이 조선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서 동래성이 왜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도성에 전해졌다. 유팽로는 의병을 일으키기 의해 도성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1592년 4월 16일 김치로부터 왜군의 조선 침입소식을 들었으며 4월 19일 도성을 떠나 공주에 도착하여 한 처사로부터 군마(軍馬)와 대검(大劍)을 구해 무장하고 귀향하였다.
임진왜란 발생 이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곽재우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592년 4월 22일 경상도 의령에서 기병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유팽로였다. 그는 도성을 떠나 고향에서 가까운 순창에 도착하였고 대동산 앞뜰에 이르니 수백의 무리가 운집해 있었다. 이들은 도적의 무리로서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불량배들이었다. 이들은 먼저 고을을 점령하여 왜군에게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려는 보전지계(保全之計)를 삼으려고 했다. 유팽로는 이들 앞에서 위국충절을 간곡히 호소하여 이들을 의병으로 삼았다. 1592년 4월 20일에 유팽로는 대동산 앞뜰에서 5백여 명의 무리들과 함께 ‘전라도의병진동장군유모(全羅道義兵鎭東將軍柳某)’의 대청기(大靑旗)를 세웠다. 이것은 유팽로가 주도한 전국 최초의 임진의병(壬辰義兵)이라 할 수 있다. 유팽로는 이러한 사실을 순창군수 임백영(任伯英)에게 알렸고 의병부대를 이끌고 성안에 머물렀다.
유팽로가 이끈 의병은 다른 의병부대와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의병은 지방민의 순수한 지원에 의해 모집된 군대가 아니었다. 그의 부대는 도적들을 설득하여 의병으로 만들었다. 유팽로의 위국충절과 지방보전을 위한 정성과 노력은 그 누구도 앞 설 수 없었다. 그는 4월 25일 창의격문을 내걸었다. 이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빠른 것이었다. 유팽로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첫째였다는 평를 얻었다.
유팽로는 그의 의병을 순창에서 옥과로 옮겨 군진을 정비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는 국난에 대비하여 사전에 마련한 군량 군기 군복 등에 의해 5백 명의 의병을 거느린 것이 가능하였다. 즉 그는 향리 뒤편에 있는 옥출산에 커다란 창고 3칸을 지어 놓고 군량과 군기 군복 등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그는 의병을 위해서 더 많은 군량과 무기 등이 필요하였다. 그는 도내 각 지역을 다니면서 의병을 모았다. 그 과정에서 광주의 고경명,남원의 양대박과 안영, 순창의 양사형 양희적 등을 만나 협력관계를 도모하였다. 광주의 김덕령과도 만나 왜적을 토벌하는 방략을 토론하였다.
유팽로는 고경명과 양대박을 5월 23일 담양에서 회동하여 의병의 부대편성과 군사전략을 의논하였다. 5월 29일 고경명 양대박 유팽로는 담양회맹군을 결성하였다. 이어서 각 지역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모아 데리고 와 추성관 앞에서 집결하여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였다. 유팽로는 좌부장, 양대박은 우부장이 되었다. 고경명 지휘 하의 전라도 연합의병이 탄생하였다. 그 부대는 오행진(五行陣)으로 편성되었는데 중단에 대장기가 있었고 동단에는 청기를 세워 유팽로가 지휘하였고, 남단에는 홍길르 세워 양대박이 통솔하였으며 서단에는 백기를 세워 고인후가 맡았고 북단에는 흑기를 세워 안영이 지휘하였다.
체제가 갖춰진 의병대는 6월 11일 담양을 출발하여 태인 금구를 거쳐 14일에 전주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10일간 의병부대가 머룰렀다. 이틈에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한편으로 양대박은 남원에 가 의병을 추가로 모으기도 했다. 양대박은 추가 의병을 이끌고 전주로 돌아오다가 임실군 운암에서 왜군과 접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대박은 뜻밖의 엽고로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고경명은 전주를 출발하여 여산 은진 연산을 지나 진산에 주둔하였다. 이때 그는 왜군이 금산을 공격하여 군수 권종이 전사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경명은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는 중이었으나 금산이 함락되고 머지 않아 왜군이 전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금산에 머문 왜군을 공격하지 않으면 전주를 잃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산을 구하려고 했다. 이에 고경명은 유팽로의 주장을 받아들여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글을 보내 금산을 함께 치자고 제의하였다. 그 제의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경명은 금산을 공격하기 위해 선봉장에 유팽로, 후군장에 안영으로 삼아 금산성을 공격하였다. 7월 9일에 금산성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고경명은 와평으로 의병을 옮기고 방어사 곽영이 지휘하는 관군과 함께 왜군의 적진을 공격하였다. 다음날에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관군은 북문쪽에서 왜군과 싸우고 의병은 동문쪽에서 왜군과 싸웠다. 왜군은 갑자기 성을 비우고 관군을 공격하였다. 급습을 당한 관군의 방어가 무너져 곽영이 도망하였다. 이에 의병진도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왜군의 공격을 받은 의병부대는 적과 싸웠지만 적에게 포위되었다. 유팽로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지만 고경명은 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유팽로는 적진 속으로 말을 타고 달려들어가 고경명을 구하려고 했다. 유팽로와 마주친 고경명은 그에게 탈출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유팽로는 고경명을 홀로 놔두지 않았다. 그는 고경명을 호위하였으며 왜군의 칼이 고경명을 향해 다가온 순간 그 자신을 던져 가로 막고 순절하였다. 고경명과 안영도 그 자리에 함께 순절하였다.
유팽로가 순절하자 그의 애마 오려가 주인의 수급을 입에 물고 고향에 돌아와 유팽로의 아내에게 전하였다. 유팽로는 29세에 운명하였다. 그의 짧은 생애는 곧은 말을 하는 선비와 위국충절을 다하는 지사의 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유팽로는 선비에 대하여 학문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유문(儒文)을 익히고 심신을 닦았을 때 된다고 하였다.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위국충절을 다하는 자세를 몸소 실행하였다.
유팽로는 1623년(인조 1년) 정려(旌閭)를 명받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에 추증되었고, 이어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가증(加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