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霽峰 高先生 年譜와 文集解題

高 山 芝 2011. 5. 31. 18:51

霽峰 高先生 年譜와 文集解題

성명 고경명(高敬命)

생년 1533년(중종 28) 몰년 1592년(선조 25)

자 而順 호 霽峯, 苔軒     본관 長興 시호 忠烈

특기사항 : 壬辰倭亂 때 나이 60에 창의하여 금산에서 순국한  義兵將이며 문장에 능하여      유 서석록과 격 제도서 등 훌륭한 글이 전한다.

 

가계도

조부 高雲 佐郞( 기묘 명현)

부 高孟英 大司諫 비 南平徐氏 徐傑의 女

高敬命 배 蔚山金氏 金百鈞의 女

장남 高從厚 縣令, 시호 孝烈公 복수장 1593년6월  진주성 순사 배 현령 李復元의 女

차남 高因厚 學諭, 贈 영의정 시호 毅烈公 금산전사

배 李璥의 女

삼남 高遵厚 早卒

사남 高循厚 監察

오남 高由厚

육남 高用厚 郡守 호 청사  배 李麟奇의 女

女 朴橚

女 盧尙龍

기사전거 : 神道碑銘에 의함

 

    연보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28 1533 계사 嘉靖 12년 11월 30일, 태어나다.

명종 7  1552 임자 20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다.

명종 8  1553 계축 21 蔚山金氏와 혼인하다.

명종 9  1554 갑인 22 아들 高從厚가 태어나다. ○ 모친상을 당하다.

명종 13 1558 무오 26 文科에 甲科로 합격하다.

         ○ 전적, 호조 좌랑이 되다.

명종 14 1559 기미 27 봄, 司書가 되다.

명종 15 1560 경신 28 文臣 庭試에서 〈胡安國不識秦檜論〉 으로 수석을 차지하여 말을 하사받 다.   ○ 정언이 되다. ○ 여름, 형조 좌 랑, 병조좌랑 겸 지제교가 되다. 이후 항상 知製敎를     겸임하다.

     ○ 賜暇讀書하다.

명종 16 1561 신유 29 헌납이 되다. ○ 여름, 수찬, 헌납, 지평이 되다. ○ 가을, 부수찬이 되다. ○ 關西에 다녀오면서 沿路에 지은 시를 올리다. ○ 겨울, 부교리가 되다.

명종 17 1562 임술 30 봄,병으로 체직되다.○수찬,부교리가 되다.

  ○ 9월, 姜士弼, 尹斗壽 등과 東湖에서 노닐다.

명종 18 1563 계해 31 三司가 이조 판서 李樑을 논핵할 때 이를 미리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전적으로 좌천되었다가 蔚山 郡守가 된 뒤 곧 파직되다. ○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19년 동안 은거하다.

   ○ 鄭澈과 奇大升에게 시를 보내다.

명종 20 1565 을축 33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 5 1572 임신 40 俛仰亭 宋純을 찾아가 시를 수창하다.

선조 7 1574 갑술 42갈천 임훈 목사와 瑞石山을 유람하고 遊山錄을 짓다.

선조 9 1576 병자 46 土亭 李之菡이 방문하여 不已로 齋名을 지어 주니 〈不已齋銘〉을 짓다.

선조 14 1581 신사 49 靈巖 郡守가 되다. ○ 宗系辨誣使 金繼輝의 書狀官이 되어 중국에 가다.

선조 15 1582 임오 50 봄, 瑞山 郡守가 되다. 蓀谷 李達이 머무르며 함께 시를 酬唱하다. ○ 가을, 詔使 黃洪憲, 王敬民 등이 나올 때 遠接使 李珥의 從事官이 되어 華使의 酬唱에 응하다.

    ○ 종부시 정, 사섬시 첨정이 되다.

선조 16 1583 계미 51 봄, 漢城 府尹이 되다. ○ 韓山 郡守가 되다. ○ 겨울,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다.

선조 17 1584 갑신 52 여름, 종부시, 사복시 첨정이 되다.

   ○ 겨울, 사예가 되다.

선조 18 1585 을유 53 봄, 군자감 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여름, 淳昌 郡守가 되다.

선조 19 1586 병술 54 7월 15일, 梁大樸과 赤城에서 배를 띄우고 노닐다.

선조 21 1588 무자 56 淳昌 郡守에서 파직되다.

선조 23 1590 경인 58 여름, 내섬시 정이 되다.

     ○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 편수관이 되다. ○ 가을, 東萊 府使가 되다.

선조 24 1591 신묘 59 봄, 光國原從功臣에 녹훈되다.

  ○ 여름, 鄭澈이 파직되자 정철의 추천을 받았다는 이유로 東萊 府 使에서 파직되어 곧 바로      귀향하다.

선조 25 1592 임진 60 5월, 아들 高從厚, 高因厚를 데리고 金千謚, 柳彭老 등과 함께 담양 (長興에서 모병),에서 처음으로 義兵을 일으켜 義兵將이 되다. ○ 7월, 錦山에서 아들 高因厚를 포함    6,000의병과 전사하다.

선조 28 1595 을미 여름, 경연에서 朝臣의 건의로 旌閭되다.

선조 32 1599 기해 - 아들 高用厚가 전사한 형의 遺蹟과 함께 공의 遺事를 정리하여 「正氣錄」을 간행하다.

선조 34 1601 신축 - 門人 朴之孝 등의 상소로 光州에 褒忠祠를 세 워 제향하고 賜額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 아들 高用厚가 문집을 간행하다. (李恒福의 序, 柳根의 跋)

인조 20 1642 임오- ‘忠烈’의 시호를 내리다.

기사전거 : 年譜(後孫 高時民 撰) 및 朝鮮王朝實錄에 의함

 

     문집편찬 및 간행

霽峰은 李達, 崔慶昌 등의 三唐詩人과 함께 詩로써 文名을 떨쳐 왔는데, 그의 시문은 自編手錄本의 형태로 사후에도 아들 高用厚(호 청사)에 의해 잘 보존되어 있었다. 高用厚의 〈覽先人遺稿有感〉에 의하면, 저자가 義兵으로 출전하기 전에 자신이 평소에 저술한 詩文을 맡기고 떠났으며 이 詩文은 이후 高用厚가 丁酉再亂 중에도 항상 등에 지고 다니며 간직해 왔다고 한다. 또 1602년경 尹根壽가 지은 神道碑銘에 “문집 5권이 있는데 세상의 문장을 논하는 선비들이 그 글을 전송하고 그 이름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라고 하여 家藏된 5권 분량의 유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들 高用厚는 이 手錄本을 가지고 1614년(광해군 6) 李恒福에게 刪定과 編次를 부탁하고 서문도 받아놓았는데 李恒福의 「白沙集」에는 본 서문이 〈苔軒集序〉로 되어 있다. 현재 詩集만으로 이루어진 原集 5권이 바로 이항복이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616년 高用厚가 南原 府使로 부임하게 되자 다시 詩 외에 약간의 文을 더 수집하여 遺集 1권으로 편차한 뒤 1617년 原集과 遺集, 續集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續集은 原集과는 별도로 柳根이 가려 뽑은 약 42수 가량의 시를 간행시 續集으로 편차한 것인데, 판식과 글자체가 原集과 약간 달라서 板下本이 달리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刊本 중 속집이 포함되지 않은 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간행 시기는 같다고 생각된다.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4510), 장서각(4-6470), 국립중앙도서관(한45-가29),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1-A476), 고려대학교 도서관(D3B-938)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초간본에는 李恒福의 서문 그리고 柳根의 跋과 高用厚의 跋이 실려 있는데, 柳根의 발문은 「西坰集」에는 제목이 〈正氣錄跋〉로 잘못 실려 있다. 또 일부 판본에는 柳根이 지은 발문이 遺集 말미에 본문과 같은 글자체로 실려 있는 반면 규장각본은 板次를 달리해 原集 끝에 大字로 실려 있어 훨씬 형식을 갖추었으니 후에 이 부분이 改刻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明人 莊應會가 지은 序가 첨부된 본이 많은데 이는 高用厚가 1631년 冬至使로 중국에 갔을 때에 그 곳에서 부친의 문집을 보여 주고받아온 것이다.

高用厚는 문집의 간행에 앞서 1599년에 저자의 임진년의 事蹟과 함께 전사한 두 형의 遺蹟을 기록한 「正氣錄」을 간행하였다. 내용은 道內에 보낸 檄書와 通文, 의병장들과의 서한, 저자의 연보와 신도비명, 묘갈명, 연보 등이 실려 있으며, 尹根壽, 李德馨, 李廷龜, 李恒福, 鄭經世, 申欽, 朴承宗 등 당대의 名賢들이 序跋을 지었다.

본서의 저본은 1617년 南原에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李恒福 撰), 跋(柳根, 高用厚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原集 5권과 遺集 1권, 續集 1권 합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集의 권수에는 李恒福의 서문이 있고 말미에 柳根의 跋이 실려 있으며 목록은 없다. 저자가 일찍부터 시로써 이름났던 만큼 원집 5권 전체가 모두 詩로서 약 1100여 수의 시가 詩體의 구분없이 연도별로 배열되어 있다. 小註는 대부분 저자의 自註이며 杜詩 등을 次韻하여 지은 시가 많아 詩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함께 酬唱한 대상도 당시 詩名을 떨쳤던 石川 林億齡, 林悌 등의 문인들이다.

1562년 王命으로 지은 권1의 〈應製御屛六十二詠〉을 비롯해〈雲谷雜詠〉, 〈息影亭二十詠〉, 〈俛仰亭三十詠〉, 〈晚翠亭十詠〉, 〈春湖十詠〉 등 연작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권4는 1581년 宗系辨誣使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지은 시들이다. 이때 수창한 시를 모아 東槎和稿로 묶고, 또 다음 해 1582년 원접사 종사관으로 차출되어 지은 시들은 皇華和稿로 묶어 놓았는데 이는 저자의 自編錄을 그대로 반영한 것인 듯하다. 梁慶遇의 霽湖詩話에 의하면 저자는 스스로 칠언율시와 배율시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시의 특징은 ‘濃麗富盛’하다고 하였고, 李山海도 항상 당대의 시인으로 비길 사람이 없다고 하며 鄭士龍보다도 위에 있다고 평가하였다.

遺集에는 〈秋霜賦〉 등 賦 3편과 雜著, 表箋, 敎書, 檄文, 詩가 실려 있다. 잡저 9편 중 〈胡安國不識秦檜論〉은 1560년 庭試에서 수석을 한 글이며, 安容의 제문과 趙璵의 묘갈명이 있다. 表와 箋은 모두 擬文이고 〈檄諸道書〉는 임진년 倡義 때 義兵將으로서 보낸 격문인데 壬辰倭亂 이후 人口에 많이 회자되던 글이다. 시는 시체의 구분없이 40여 수가 실려 있는데 일반적인 문집구성과 달리 文 뒤에 편차된 것이 특이하다. 권말에 高用厚의 발문이 있다.

續集은 “西坰選”이란 기록이 있어 柳根이 선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2수의 적은 분량의 시이지만 原集이나 遺集과는 달리 詩體別로 편차되어 있다. 즉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율시 그리고 長韻의 排律詩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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