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순창경명창의권후(書高淳昌敬命倡義卷後)-이항복(李恒福)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미 호남(湖南)의 고제봉(高霽峯)은 말세의 뛰어난 시문가(詩文家)라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흔연히 그를 흠모하여, 조만간에 예물을 받들고 찾아가 한번 얼굴을 뵙고서 용문(龍門)에 오르는 영광을 입으려고 희망했었다.
그러다가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면서
사관(史官)으로 서상(西廂)에 근무할 적에,
이 때 마침 조정에서 변무사(辨誣使)를 선발하여
별전(別殿)에서 사연(賜宴)을 하게 되자, 삼사가 소장 밖에서 기다리면서 용모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부사(副使)인 한 장자(長者)를 보니,
풍채가 마치 우뚝 서 있는 고니와 같았으므로,
내가 여러 사람 가운데서 그를 이상하게 여기어 물어보고서야 공(公)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는 공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지나갔다.
이윽고 잔치가 파함에 미쳐서는
차례에 따라 가장 뒤에 나오면서 바라보니,
공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나와
머뭇거리며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짐짓 선정문(宣政門) 아래에 오랫동안 서 있다가
나에게 읍(揖)을 하였다. 그리하여 한참 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손을 잡고 평소의 회포를
즐겁게 담론하였는데,
호쾌한 기상(氣象)이
뛰어난 풍류(風流)를 상상할 만하였다.
그 후 임진년의 변란을 당해서
주상(主上)은 서쪽 변방에 몽진(蒙塵)하여 있었고,
나는 부재(不才)한 사람으로 중병의 깃발을 잡고
외침(外侵) 수비에 종사하였다. 이때 중외(中外)의 관록(官祿) 먹는 자들이
서로 다투어 처자(妻子)를 이끌고 조수(鳥獸)처럼 숨어 있었는데,
유독 공만은 그때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처지였는데도
소매를 떨치고 분발하여 일어나서
즉시 사람을 시켜 달려보내서 관수(官守)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때 내가, 공이 사전에 미리 일을 규획(規畫)하고 포치(布置)하는 것과
엄하고 과감하게 일을 결단하는 것을 듣고서,
장차 큰일을 해내리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어서 군대가 부족한 탓으로 전사(戰死)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비록 그 뜻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축적하고 있었던 것은 대략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공이 여러 군영(軍營)에 전유(傳諭)한 격서(檄書)와 통문(通文)을 얻어서
삼가 읽어보니,
짧은 시간에 문장을 자유자재로 여유 있게 구사한 것이
대단히 화려하도다.
어찌 다만 풍우(風雨)가 몰아치고 강하(江河)가 거대히 흐르는 듯한 정도일 뿐이겠는가.
마치 무지개와 놀이 하늘에 펼치어 말았다 폈다 하는 듯한 문장도
족히 더 훌륭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그 중에도 유독 가전(家傳)의 의열(義烈)이
온통 여기에 실려 있는 것이 귀중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공의 여사(餘事)인 것이다.
후일 선정문(宣政門) 아래서 본 것보다 못하고,
선정문 아래서 본 것은
그 행사(行事)에서 얻은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마치 큰 고기를 먹을 적에
고기를 많이 씹을수록
맛이 더욱 깊어지고
즐기는 마음도 더욱 두터워지는 것과 같다 하겠다.
덕(德)이 있는 이는 반드시 말을 남기는 것이로되,
말을 해 놓은 것이 아름답게 꾸며지지 않으면
어떻게 후세에 일컬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와 같은 말은
참으로 썩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공이 만일 삼경을 능히 수복하고 상공(上公)의 관작에 책훈되었더라면
천지 사이에 드높고 우주 안에 드리운 것이
과연 지금과 같았겠는가.
군자가 이르기를,
“태상(太上)은 이름을 세우고,
그 다음은 공(功)을 세운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비로서 공은 부족하나 이름을 세운 경우야말로
또 한이 될 것이 있겠는가.
기나긴 날에 한가히 지내면서 무릎을 안고 한 번 읽어보니, 사림(詞林)에 사기를 더해줌으로써
변 성양의 가세는 너무도 적적했음을 깨닫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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