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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산 지 시 인 |
양산(陽山) 아래 쑥우물(나정·蘿井)
백필(白疋) 백마(白馬) 무릎 꿇자
붉은 알 깨고 나온 아이
바로 볼 수가 없네
새, 짐승 춤을 추고
해와 달 청명(晴明)하니
세상을 밝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탄강(誕降)했네
기와지붕 난간(欄干)삼아
빛의 제단 설치하고
하늘의 뜻 헤아리는
기양제(祈禳祭)를 드리네
해와 달과 별의 빛
고여있는 하늘샘
두레박 드리우고
빛을 건져 올리네
ㅁ자형 집은 경북 안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옥 형태로, 대체로 안채를 구성하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외부에서 직접 접할 수 있는 부분은 사랑채이며 안채의 공간을
밖에서 볼 수 없도록 만든 구조다. ㅁ자형 집이 발달한 배경에는 내외를 철저히 가리는
유교적 생활원리가 자리잡고 있다. 남성의 개방적 공간과 여성의 폐쇄적 공간을 하나의
가옥으로 구성함으로써 유교이념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자연채광을 위해
집 중앙에 '햇빛우물’을 만든 양동마을의 가옥 구조는, 상(商)나라 후손인 휘상(徽商)들이
건설한 서체촌(西遞村)의 가옥구조와 비슷하다. 휘상들이 하늘우물(천정·天井)이라
부르는 안마당을, 우리는 폐쇄적인 공간에 빛을 끌어들이는 햇빛우물로 봤지만 그들은
천정에 고이는 비를 금(金)으로, 눈을 은(銀)으로 생각하고, 비와 눈이 안마당에 떨어지면
부(富)가 집에 쌓인다고 믿었다.
하늘과 소통했던 셈족, 욕단의 후손들이 동쪽으로 이주해 상나라를 건국하고 문자를 만들어 하늘 비밀을 문자 속에 숨겨놓았다는 가설은 창세기를 이해하지 않고는 뜻글자인
한자(漢字)가 해석되지 않은데 그 연유가 있다. 20세기 초까지도 사람들은 상나라의 실재를 믿지 않았다. 상나라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나라일 뿐이었다. 1899년 청나라 국자감의 제주(祭酒, 지금의 국립대 총장)였던 왕의영은 금석학 등에 조예가 깊어 그의 문하엔 항상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어느날 말라리아에 걸린 왕의영에게 특효약으로 소문난
용골을 갈아 복용하라는 의원의 진단이 나왔다. 용골을 구해와 약재로 만드는 현장에 있던 제자 유철운은 갑골위에 새겨진 글자의 흔적을 발견했고, 얼마 후 3000년이 넘도록 땅 속에 감춰져 있던 상나라의 실체가 갑골문자에 의해 밝혀졌다. 하(夏)나라를 섬기던 상족은 이미 동북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상족은 이주를 거듭하다가 현 하남성 상구인 박(亳)에 도읍한 후 하나라에 대한 공납을 중지했다. 이에 노한 걸왕이 토벌군을 일으키자 걸왕의
폭정에 항거하는 내란이 일어났다, 상의 14대 탕왕(湯王)은 이 기회를 틈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웠다.
‘사기’의 ‘은본기’에 ‘상나라는 탕왕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쓰러뜨리고 주변국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해 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야
비로소 은에 정착하게 됐다’라고 기록돼 있다. 상나라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주(周)나라는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 때 국력이 크게 신장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상(商) 왕실은 계력을
살해했다. 계력의 아들 문왕은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상나라 정벌의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무왕(문왕의자)은 ‘목야의 결전’에서 상의 대군을 격파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했다. 상나라를 멸한 무왕의 동생 주공은 상나라 사람들이 장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때부터 장사하는 사람을 통칭해 ‘상인(商人)’이라고 부르게
됐다. 중국의 전통가옥인 한족의 사합원이나 객가(Hakka-客家)족의 전통 가옥인 토루,
모두 서체촌의 ㅁ자형 가옥을 변형시킨 구조다. 중국의 2대 상인으로 불리는 휘상의
상술에는 혹시 유대상인의 DNA가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