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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지 시인 |
믿음의 시루에
소망의 콩을 심고
사랑의 물을 주네
물은 흘러내리는데
떡잎으로 변한 콩
생명을 얻었네
사랑의 힘으로
생명을 얻었네
믿음 소망 사랑이
기적을 일구는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네
사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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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랑’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게 하는 사랑을
치사랑이라고 한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옛 말이 있다.
이는 부모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한없이 크지만
자식들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것에 못 미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온
예수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다.
위에서 아래로의 상선(上善)의 사랑이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는 생명의 사랑이다, 물은 흘러가지만
싹이 트고 자라는 콩나물에서 우리는 상선의 사랑을 깨닫는다.
‘착할 선(善)’자를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저자 허신은
‘길하다(길야·吉也)’라고 풀이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왜 ‘길할 선’이라 하지 않고 ‘착할 선’이라고 할까,
그리고 ‘착하다’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가 바로 그것이다.
‘착하다’의 어원은 ‘붙을 착(着)‘자다.
붙을 착자는 양 양(羊)자와 삐침 별(丿)자,
눈 목(目)자가 합해진 형성문자다.
‘지팡이(丿)를 들고 돌보고(目) 있는 목동 곁에 양(羊)이
붙어있어야만 길(吉)하다’라는 것이 ‘착하다’의 본래 의미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예수의 복음(福音)이 착할 선자에 담겨 있다.
그러나 세상이 하 수상해 요즈음은 ‘착하다’의 뜻이 변질됐다.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은 ‘착하게만 살면 되지’ 하면서 살아간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 탓만 하는 세상이다.
사전은 착할 선자를 ‘잘하다’
또는 ‘도덕적 기준에 맞게 제대로 하다’로 풀이한다.
‘제대로 하다’와 ‘법대로 하다’를 합친 ‘제법이네’라는 말이 사라진 사회,
어른 부재(不在)의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손아랫사람이 일을 잘할 때 어른들은 “제법이네”라고
칭찬을 해주곤 했는데,
이 시대 어른들은 사라져 버렸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통해 인위적인 가식과 위선에서 탈피,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상선을 노자(老子)는 물에 비유했다.(상선약수·上善若水)
노자에 의하면 물에는 여덟 가지 덕성(德性)이 있다.
1덕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함이요,
2덕은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다.
3덕은 차별하지 않고 구정물까지 받아주는 포용력이요,
4덕은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이다.
5덕은 낙수방울로 바위에 구멍을 내는 인내와 끈기요,
6덕은 벼랑 끝에서 몸을 던져 장엄한 폭포를 만들어내는 용기다.
7덕은 바다를 목표로 유유히 흘러가는 질서요,
8덕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상선이다.
물은 존재함으로 움직이는 유기체다.
존재하는 곳이 낮은 곳이기에
낮은 곳을 향해 머뭇거리지 않는다.
물은 가파른 데서는 가파르게 움직이고
느긋한 곳에서는 느긋하게 움직인다.
바다에 이르면 형체를 바꾸어 하늘로 올라가
구름으로 떠돌다 빗방울이 돼 떨어진다.
조건 없이 자신을 내주고 존재하는 곳에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여!
몸을 더럽혀 세상을 정화시키고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물이여!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선 전진하지 않는, 흐르는 물이여!
물의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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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 로 그 - http://blog.daum.net/zeroko2000
블로그 제 목 - Ko San Gi - Interro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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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일 금강일보 2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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