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마을

제 3부 고을과 마을편(故鄕,村落篇)

高 山 芝 2017. 5. 1. 23:03

제 3부 고을과 마을편(故鄕,村落篇)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 - 평화리(平化里) 유래

 

억불산(億佛山) 입구에 위치한 평화마을(平化村)은 고려시대(918∼1392), 억불산(億佛山) 봉수대(烽燧臺)를 관리하던 병정들이 거주하는 정화소(丁火所)의 소재지였다. 고려 말 왜구토벌에 공을 세운 신경원(申敬源)이 조정으로부터 하사(下賜)받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사전(賜田)인 화속지(化屬地)였다. 그의 손자 신원수(申元壽)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평산인(平山人)의 화속지(化屬地), 첫 글자를 택하여 마을 이름을 평화마을(平化村)이라 정하였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5 대손 고응수(高應壽)가 창평에서 장흥으로 이거한 후 그의 손자 고석겸(高碩嗛, 鎭海公)이 영조 때의 국지사(國地師) 이계현(李啓鉉)의 권유로 1770년 평화리에 터를 잡은 후 지금까지 장흥고씨(長興高氏 또는 長澤高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1941년 평화리(平化里)로 했다가 내평(內平)과 외평(外平)을 구분, 내평(內平)을 평화1구, 외평을 평화2구라 하였다. 현재는 내평(內平)인 평화1구를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로 부르고 있다.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에서 * 1

 

웃사장 지나서

동산을 끼고 돌았네

 

인적(人跡) 사라진

잡초(雜草) 무성(茂盛)한 고삿길

 

늙은 팽나무 한 그루

게으름을 피우다 나를 반기네

 

"언제 왔능가 ?"

 

대바람 소리

솔바람 소리

 

배롱나무 가지 흔들리고

 

삔추랑 때까치

산비둘기 날아와서

 

"예 마리오 예 마리오

이게 누구 누구당가?"

 

반가움에 노래하네

 

"이게 이게 누구당가?"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에서 * 2

 

사금파리 같은

내 유년(乳年)의 파편들이

 

기억(記億)을 헤집고

살아나는 해어름

 

술래잡기하고 놀던

제각(祭閣) 문 닫혀 있다

 

적막을 깨뜨리는

흑염소 울음소리

 

차뜽의 소나무

울창했던 동백나무

 

낯이 선 넝쿨장미가

나를 맞는다

 

흔적없이 사라진

우복동(牛腹洞) 집터

 

무심한 저수지

흔들리는 쪽달따라

 

등멱 즐기던 현이성(賢兄)이 보인다

씨름하며 뒹굴던 동무들이 보인다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에서 * 3

 

내 유년의 설레임

찬란한 이야기되어

 

황홀한 이파리

무성했던 고을

 

세월의 무게

이기지 못해

 

가지 꺽

꺾인 팽나무

병색(病色)이 완연하네

 

때죽나무 하얀꽃만

나를 반기는데

 

열매 으깨어

개울에 풀어놓고

 

물고기 잡고 놀던

동무 사라진 동네

 

나무 등걸 뚫고

솟아오른 왕죽순 한 그루

 

나를 보고 낯이 선지

눈길을 비켜가네

       

 

예마리요

 

“예마리오 장에 가요"

 

고향(故鄕)은

쟁반 위를 구르는 구슬

 

아낙네 부르는 소리

방죽 주위 맴돌다

 

배롱나무

길을 따라

 

"예마리오 예마리오"

 

하얀 감꽃이

가운뎃 골 찾아오면

 

차뜽의 소나무도

 

"예마리오 예마리오"

 

동산의 비둘기도

왕대밭의 장끼도

 

고향은 언제나

 

"예마리오 예마리오“

 

      

고향(故鄕)의 소리


"예마라오" "예마리오"

다정(多情)한 소리

 

내 가슴 후비는

유년(幼年)의 소리

 

"예마리오" "예마리오"

다감(多感)한 소리

 

그리움이 배어 있는

정(情)겨운 소리

 

보리밭에 날아든

까마귀 소리

 

자운영밭 뒹굴던

동무들 소리

 

"예마리오" "예마리오"

그 말 한 마디

 

그 억양(抑揚)에 묻어있는

고향(故鄕)의 소리

 

내 가슴을 저미는

눈물의 소리

 

* - "예마리오" 라는 졸시(拙詩)를 읽던 박양심 권사가 눈물을 흘렸다. 고향을 떠난 후 잃어버렸던 고향사투리. 반세기 만에 맡아 본 고향내음  때문이었을 게다. 권사님의 영결식장을 다녀와서 불현듯 그 생각이 나서 잡아 본 시상(詩像)이다.   


 

망부가(望婦歌)

 

여든 두살 난

촌로(村老)

 

한쪽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삭히던 슬픔

주체할 길 없어

 

닭똥 같은 눈물

손등으로 훔쳤다

 

꺼억 꺼억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날 두고 먼저 가면

어쩌라고 어쩌라고"

 

향초를 태우고

가슴마저 태우는

 

촌부(村夫)의 울음소리

이내 가락이 되었다

 

심금(心琴)을 울리는

노래가 되었다

 

 

* 記 - 박양심 권사를 떠나보내는 영결식장, 예배를 드리다 소리내어 우는 최갑진 집사님을 보고 같이 울고 말았다. 눈물을 훔치는 사람은 나 뿐만은 아니었다. 옆에 앉았던 김순채 집사나 박영규 집사 등 남자성도들이 같이 울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성도의 추도예배에 참석했지만 남자 성도들이 이렇게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친구

 

저자거리에서

고향친구를 만났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

 

논두렁 밭두렁 굽은 길들이

그의 이마에 걸려 있다

 

자운영밭에서

 

돼지 오줌보로

공차기를 하던 시절이

 

환하게 되살아나

젓가락에 잡혔다

 

빈 깡통에 불꽃을 담아

 

돌리다 돌리다

끝내는 하늘로 날려보낸

 

쥐불놀이의 불꽃이

소줏잔 위에서 널름댔다

 

울컥 치밀어오르는

내 유년(幼年)이

 

그의 눈 속에서

하염없이 솟아났다

 

   

고향 풍경

 

어둠을 거둬내자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던 하늘

 

모습을 드러낸다

 

아욱. 우엉. 상추. 쑥갓 등이

널부러진 텃밭

 

넝쿨에 매달린 채

지지대를 타오르던 오이

 

거친 숨 토하며

하얀 꽃망울을 터뜨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토란 이파리

이슬방울이 데구르 구르고

 

질경이 토끼풀

어우러진 길섶

 

이름 모를 야생화

빙그레 웃고 있다

 

 

  

고향(故鄕)

 

유년(幼年)은

 

진한 아카시아 향기를 풍긴 채

 

떡깔나무 위에서 졸고 있다

 

동구 밖

 

신작로를 따라 달려가는 아이들

 

보리타작을 끝 낸 마을에는

 

샛바람이 불고

 

동산 너머로

 

서녘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고향(故鄕) * 2011

 

눈이 날린다

 

흩날리는 눈발따라

 

그리움이 쌓인다

 

뼛 속까지 스며든

 

그리움이 얼어

 

살얼음이 된 실개천

 

얼음장을 덮고서

 

잠이 든 기다림을 안고서

 

시냇물이 흐른다

 

   

  

고향(故鄕) * 2012

 

 

"밥 한 그릇 줘유“

 

"한 그릇만이라우"

 

"사람은 두 명인디 한 그릇으로 되것소"

 

질박한 소리가

정겨운 리듬이 되어

귓전을 후비고 지나간다

 

맛과 소리를

다정하게

버물러 논 밥상 위에

 

그리움이

민낯을 드러내며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고향(故鄕) * 2013

 

함박눈 송이

 

송이따라

 

붉은 동백(冬柏)꽃

 

꽃 이파리 떨어지네

 

눈 위에 번진

 

동백(冬柏) 꽃이파리

 

앵혈(鶯血)이 되어

 

앵혈(鶯血)이 되어

 

오는 봄 재촉하네

       

해남댁 감나무

 

까치발 딛고

 

하늘 쳐다보네

 

감나무 가지에 걸린

 

시리도록 파란 하늘

 

하늘 접시에 담겨진

 

붉은 홍시 하나

 

삔추 한 마리 날아와

 

쪼고 있네

 

쪼고 있네


  

고추의 꿈

 

태양을 닮고 싶어

 

태양을 바라보다

 

한여름 불볕에

 

몸을 달구네

 

풋풋한 피부에

 

우러나는 선홍빛

 

태양을 닮고 싶어

 

붉게 변하네

 

   

저녁 노을

 

높새바람의

 

가슴 아린 풀무질로

 

달구어진 내 유년(幼年)이

 

기억(記憶)을 깨고 날아오른다

 

 

종일 토록

 

나를 달군 당신은

 

선홍빛 노을이 되어

 

이 저녁 탐진 들녘을 사룬다  

 

* 記 - 탐진(耽津) 들녘 : 전남 장흥에 흐르는 탐진강 주변의 들녘.

 

 

귀향(歸鄕)

 

차창(車窓)에 걸린 초승달이

 

서촌(西村) 하늘에 모음(母音)을 뽑아낸다

 

의식(意識)의 터널을 지나

 

녹슨 레일을 굴러 타오르는 까치노을

 

유년(幼年)의 바람은 힘겹게 흔들리고

 

구름으로 피어

 

그림자만 남기고 떠나가는

 

목포행 완행열차(緩行列車)

 

땅거미가 지는 역전(驛前) 대합실

 

목 쉰 아낙의 정겨운 목소리가

 

저만치 고향땅을 먼저 밟는다

 

  

     

고향 길

 

그 해 장마비에

천강수 범람하자

 

허리까지 찬 신작로

업혀서 통학했네

 

폭우에

떠내려온 구렁이들

 

또아리 틀던 가로수

아슴아슴하는데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고향길

 

산천(山川)이 의구란 말

옛시인의 허사련가

 

굽이쳐 흐르던

방천 둑은 사라지고

 

그리움만 남기고

꿈길이 되었네

 

         

정화사 사랑나무

 

글공부 뒷바라지 첫째부인 사별하고

처녀 재취 맞아들여 결혼한 김생원

 

합환주(合歡酒) 들이키고 신방에 들었으나

소복여인 환영(幻影)으로 합방(合房)을 할 수 없네

 

첫째부인 어른거려 합방치는 못했으나

재취부인 시중으로 글을 읽는 김생원

 

회화꽃 꽃이 피자 한양으로 올라갔네

매일 저녁 목욕재계 정화수를 떠놓고

 

금의환향 기원하며 무릎 꿇고 비나이다

천지신명 북두칠성 성황님께 비나이다

 

우리 낭군 장원급제 금의환향 비나이다

부처님께 비나이다 상제님께 비나이다

 

불쌍하다 처녀부인 이 일을 어이할꼬

한양간 낭군이 주검되어 돌아왔네

 

하늘도 무심하지 이 일을 어이할꼬

처녀로 시집 와서 처녀로 늙은 부인

 

전처의 자식들 알뜰살뜰 키워서

성가(成家)하고 출가(出嫁)시켜 어미 본분 다하자

 

정화사 왕대밭 느티나무 귀목나무

김생원 처녀부인 연리목(連理木)이 되었네

 

   

生石紀行 * 들돌의 전설

 

 

마을 어귀 사장 터에는

 

동네 노인들이

사장나무 그늘을 벗 삼아

 

들돌 위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쇠돌을 들어 올려

 

상 일꾼 소리를 들었던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으며

 

들돌을 못 올리면

 

품앗이조차

해주지 않았던

 

시절을 생각하며

웃고 있었다

 

작고한 장성아저씨는

 

열네살에 진세돌을 들어올려

장사라고 소문이 났었고

 

동산의 종운이 형님은

열여섯에 들돌을 들어 올려

 

그 또래에서는 힘이 제일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세상은 변하여

머슴이 없어지고

 

상일꾼이 사라진 동네에는

들돌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전설이 되어

마을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生石紀行 * 억불산(憶佛山) 며늘바위

 

 

산자락 그 어디메

 

한(恨)으로 남아

 

끝내는 돌이 된 며늘바위여

 

수려한 봉우리는

 

억겁(億迲)을 견디며

 

애틋한 그리움

 

가슴에 묻어둔 채

 

장흥(長興) 벌 평화(平化) 뜰을

 

지키고 있네

 

 

生石紀行 * 추강사우(秋江詞宇)

 

새해 벽두부터 흙비가 내리더니

지진과 홍수 등 천재지변 계속되고

 

철 잃은 복숭화가 가을에 피어나

뒤숭숭한 민심이 요동치던 날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한 소리가 일어나

 

천기(天氣)가 불순함은

소릉폐치(昭陵廢置) 때문이라 직언(直言)하네

 

"내가 저 사람의 도(道)를 배우려 하나

저 사람에게는 도(道)가 없고

내가 저 사람의 학업(學業)을 배우려 하나

저 사람에게는 학업(學業)이 없다"

 

직언(直言)한

스물다섯의 젊은 유생(儒生)

 

세상은 그를

광동(狂童). 광생(狂生)이라 불렀네

 

세상이 싫어 무악(毋岳)에 올라 통곡하다

압도(鴨島)에 타루(柁樓)를 짓고

 

거룻배에 누워 술과 벗해 보지만

가슴에 쌓인 울분(鬱憤) 어찌할 수 없었네

 

고독(孤獨)과 실의(失意)를 털어내고자

금강산에 올라 설악을 밟고

 

송악을 지나 평양에서 단군은 만났네

백마강에서 눈물 짓고 지리산을 찾았네

 

남도의 끝자락

장흥(長興)에서 만난 강호의 친구들

 

낚시를 하다

한 잔 술에 흥(興)이 오르니

 

"천은(天恩)이 내리면

낚시를 접고

출사(出仕)하라 하네

출사(出仕)를 하라 하네"

 

가난과 병마(病魔)가

여독(旅毒)에 묻어나 슬픔이 되고

 

소갈병(소渴病)에 목이 타

물조차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네

 

나락(奈落)과 같은

영락(零落)에 눈물도 마르더니

 

서른 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네

 

육신 떠난 그의 혼백(魂魄)

행주를 떠도는데

 

무슨 미련 남아 있어

행주를 떠도는가

 

그의 스승 김종직은

"우리 추강(秋江)" 불렀었고

 

살아 생전 생육신(生六臣)으로

매월당(梅月堂)과 벗했는데

 

세상은 그의 주검 편안히 두지 않네

 

갑자사화(甲子史禍) 연루되어

부관참시(腐棺斬屍) 형(刑)을 받고

 

시신의 뼛가루는

나루터에 뿌려졌네

 

미친 것이 세상인가

백공(伯恭)이 미친 건가

 

두번 죽은 우리 추강(秋江)

사육신(死六臣)에 버금가네


온갖 풍상 겪으면서

오백년이 흘렀으나

 

암각(巖角)된 추강사우(秋江祠宇)

바위 위에 살아 있네

      

* 암각(巖角) - 추강사우(秋江祠宇)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예양서원(汭陽書院)뒤편 바위에 세겨짐. 남효온(南孝溫)은 명가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의 고손자이며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남간(南簡)의 증손이었다. 조부 남준(南俊)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는데 부친 남전(南恮)이 벼슬을 못하고 31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모친은 영의정 이원(李原)의 손녀였다. 그러나 소릉복위상소를 올린 후로 여러 곳을 유랑하며 살았는데 전라도에서는 특히 장흥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때 장흥 위씨(魏氏), 수원 백씨(白氏), 영광 김씨(金氏), 인천 이씨(李氏) 등의 유력 사족과 긴밀하게 지냈다. 이러한 이유로 장흥 지방 사림이 광해군 12년(1620)에 이색(李穡)을 위하여 건립한 예양서원에 숙종 7년(1681)에 배향되었다. 김시습 ,조려, 성담수, 원호, 이맹전, 등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으로 알려진 남효온(南孝溫)은 자(字)가 백공(伯恭)이요 호(號)는 추강(秋江)이다.

 

* 소릉폐치(昭陵廢置)

단종을 낳은 현덕왕후가 문종의 현릉에 합장하기 전 현덕왕후의 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