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부 전설과 설화편(傳說.說話篇)
- 국로(國櫓). 무계(霧溪) 그리고 우복동(牛腹洞)에 얽힌 ......
1] 국로(國櫓) 고제환(高濟渙)
헌종 9년, 1843년 12월 26일 34세에 무과에 급제한 국로 고제환은 선전관(宣傳官)의 명을 받고 16세의 헌종(憲宗)을 호위(護衛)한다. 1849년 6월 6일, 23살의 나이로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6년 동안 헌종(憲宗)을 모셨던 고제환(40세)은 1849년 7월 25일 보성군수에 임명된다.
보성군수 재직 9개월에 고재환은 1차 옥사(獄事)를 걲게된다. 남병철의 기를 꺾기 위해 안동김씨 김문기는 철종 1년 1850년 5월 9일 오류(誤謬)투성이인 보성군 향교(鄕校)의 경술복합상소(庚戌伏閤上訴)를 근거로 남병철(南秉哲)과 고재환 그리고 능주목사 김진화를 의금부로 송치했다.
철종 4년 1853년 10월 10일 사면되어 고향에 은거한 고제환은 10년 후 철종 13년 1862년 5월 25일 장흥(長興)민란(民亂)의 괴수(魁首)로 2차 옥사(獄事)를 치루었다. 이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일성록에 32번 기록된 그는 65세에 당당히 무산부사(茂山府使)로 복귀(復歸)하여 80세에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됐다.
2] 우복동(牛腹洞)과 영암(靈巖)댁 여인들
동산집에 살던 영암할아버지 고재기(高在基)는 십승지(十勝地)를 꿈꾸며 차뜽자락에 팔간접집을 성주하고 우복동(牛腹洞)이라 불렀다.
며느리(강골백모)와 같이 잉태한 영암할머니는 안방을 백모에게 내주고 가운뎃골에서 아버지를 출산했다.
백부는 휘문고보에 다니던 중 야구공을 맞은 상처가 폐병으로 도지자 낙향을 했다. 당시 열아홉의 신부 강골 백모는 허벅지살까지 때어서 남편의 병구완을 하였으나 백부는 끝내 요절(夭折)하고 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영암할머니는 14살 된 막내아들인 아버지를 전남 장흥에서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함흥도립병원 송춘하 원장에게 보내서 의술을 배우게했다.
해남 계곡으로 출가한 진매고모는 고숙이 돌아가시자 형제를 이끌고 동산집에서 살다가 우복동으로 이사를 했다.
고모가 돌아가신 후 우복동은 평화저수지 부지로 흡수되어 매몰된다.
3] 무계(霧溪) 고영완(高永完)
무계(霧溪)의 고택(故宅)으로 알려진 정화사의 주인이다. 일본유학 중 농민계몽운동을 하였고 조선학생동지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해방과 함께 미군정하에서 장흥군수를 역임하였다,
제헌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을 한 후 감찰위원회 정보관으로 활동 중 농림부장관의 양곡매입비 조작 및 조작비유용사건과 상공부장관의 수뢰 및 국가재산남용사건으로 이승만대통령과 대립하였다. 재차 장관파면을 의결한 후 정인보감찰위원장과 함께 감찰위원회를 물러나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지 6일만에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가 발발했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대통령의 최대실정인 국민방위군사건을 국회에서 밝혀냈다. 자유당정권의 요주의 인물로 낙인, 3.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부정선거로 낙선하였다.
4.19혁명 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구데타로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대지주(大地主)임에도 동내 이장을 맡아 농민계몽운동을 하였으며 학교부지와 농촌개량사업에 자신의 토지를 쾌척한 독지가였다.
우복동(牛腹洞) * 1
우복천(牛腹泉) 시린 샘물
표주박에 떠올리자
떠올린 표주박에
초승달이 담겨 있네
사랑방 문을 열고
차(茶) 끓이는 영암양반
탕관(湯罐)에 손톱달 풀어
다로(茶爐)에 올려놓네
뽀골뽀골 끓는 물
공기방울 만들더니
날카로운 소리되어
솟구치기 시작하네
장대비가 지나가듯
왕대밭을 후득이고
다산등(茶山嶝)을 때리는
자진몰이 바람소리
송풍성(松風聲) 삼매음(三昧音)
작설차(雀舌茶)에 배어드네
들이키는 차(茶) 한 잔에
삿된 기운 사라지네
들이키는 청량함에
사위가 신령하니
우복동(牛腹洞) 이상향(理想鄕)
예 아니고 어디일까?
우복동(牛腹洞) * 2
차뜽(茶) 자락 소배지
팔칸접집 성주하여
십승지(十勝地) 꿈을 꾸던
우복동(牛腹洞) 할아버지
봉옥시 감나무에
새순이 솟아나고
백목련과 동백꽃이
흐드러지던 날
봄꿈을 깨고 보니
가슴이 아려오네
장자(長子) 먼저 보낸 한(恨)
어디에다 토해낼까
우복천 시린 물로
차 끓이는 할아버지
청상과부(靑孀寡婦) 자부(子婦) 성정(性情)
작설차(雀舌茶)로 삭히지만
눈에 넣어 아프잖던
장손(長孫)마저 요절했네
강골백모(伯母)
종수(從嫂)씨와 광주로 이주(移住)하고
진매고모(姑母)
아들 형제(兄弟) 우복동(牛腹洞)에 들어왔네
땀띠 들어가던 우복한천
풍부한 수량으로
탱자나무 울타리
가뭄에도 무성했네
강산이 변하고 수몰된 소배지
떠돌던 십승지 흰구름이 되었네
전설(傳說)이 된 우복동(牛腹洞)
저수지에 떠오르네
영암(靈巖)할머니
고부(姑婦) 함께 아이가 들어서자
며느리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가운뎃골 초가(草家)로 옮기신 할머니
새벽마다 공복(空腹)에 간장을 마시었네
그 나이 주책이란 부끄러움 때문에
유산(流産)시킬 목적으로 간장을 들이켰네
모진 게 생명인가 태어난 막내아들
병치레 자주하는 허약한 아이였네
할아버지 영면(永眠)한 후 막내아들 장래생각
열네살 난 아들을 함흥으로 보내었네
정남진 장흥에서 함흥까지 가는 거리
할머니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
함흥도립병원 원장 송춘하씨 밑에서
의술을 배우는 막내아들 눈에 밟혀
괜찮을 거라는 주위 권면(勸勉) 아랑않고
웃사장에 홀로 앉아 신작로 만 바라보네
금방 뛰어올 것 같은 아들을 그리면서
이제나 올까나 읍내를 바라보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들만 바라보다
눈이 물커 어두어진 영암할머니
언제나 한복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삼국지를 즐겨 읊던 삼국지 할머니
6년 만에 상봉한 막내아들 부여안고
어두어진 두 눈이 보이기 시작했네
강골백모(伯母)
신학문 배운다며
경성 유학 떠난 백부(伯父)
휘문고보 다니던 중
야구공에 얼굴 맞아
고향에 돌아왔네
고향으로 돌아왔네
결핵균(結核菌) 감염되어
폐병(肺病)으로 도진 질환(疾患),
기침소리 급해지고자
비릿한 핏덩이를 요강에 토해 놓네
기장쌀밥, 도라지와
지네, 닭과 오소리기름
폐병(肺病)에 좋다는 구렁이도 구하여
서방님 봉양하던 열아홉살 큰 어머니
객혈(喀血)이 잦더니 식은 땀 흐르고
골골거린 기침소리 아픈 가슴 거머쥐는
피골상접(皮骨相接) 남편을
눈뜨고는 볼 수 없네
인육(人肉)을 먹으면 폐병이 낫는다는
방물장수 말을 들은 열아홉살 큰어머니
허벅지 살 떼어서
남편을 봉양(奉養)했네
하늘이 무심(無心)하고
땅 또한 박정(薄情)하네
큰어머니 허벅지살 알고나 드셨을까
그 해 겨울 못넘기고 돌아가신 큰아버지
명치대학(明治大學)에 유학중인
해리당숙. 장성당숙
부음(訃音) 듣고 읊은 애사(哀詞)
심금(心琴)을 쥐어짜네
애사(哀詞)의 구절구절
슬픔이 묻어나고
애사의 구구절절
친족애(親族愛) 배어 있네
큰어머니 귀한 행실 열려정문(烈女旌門) 세워서
총생(叢生)들에 알려 주잔 무계(霧溪)형님 떠난 마을
큰어머니 전설(傳說)만이
동산집을 맴도네
동산 설화
동산에 달 뜨면
무등을 태워준 양섭 아제
아재의 상모와 함께
농악대 흥겨운 꽹과리 소리
우리들 어깨춤 들썩거렸네
대야의 뜨건 물에 문고리 담궈서
물 위 뜬 기름으로
닭서리꾼 잡아내던
강산대모 화려한 수사기법에
우리들도 놀라고 콜롬보도 놀랐네
닭 잡을 줄 모르면서 닭을 잡는 여인들
털 만 뜯긴 장닭이 발가벗고 달아나자
어머니도 뛰어가고 오님 누나 함께 뛰던
왁자지껄 시끌벅적 눈에 선한 야단법석
동산에 벌어젔던 장닭잡기 경주여
간질을 앓고 있던
가운뎃골 갑순이 성
윗사장 다리 위 조울다가도
동네 아이들 나를 놀리면
정신이 돌아와서 야단쳤었지
이야기 감추고 이야기를 숨기며
영암댁 흔적이 숨을 쉬는 동산집
무성한 숲 사이로
마실나온 어린 시절
달빛에 흠뻑 젖어 우듬지에 걸려있네
사모곡(思母曲) * 1
내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눈 맞추시며 궂은 일 마다 않던 어머니
당신의 가슴을 졸이게 하던
철 모르는 아이는
당신의 품을 떠나
당신의 관심을 벗어나
뜻 대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어리석은 놈이었습니다
하는 말은 언제나 날카로워서
당신의 가슴에 상처를 냈고
대못을 박기도 한
몬난 사내였습니다
세상 풍파에 날개 꺾여 찾아온
아들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함을 자책하며
손수 차려 주신 그날의 밥상은
당신의 절제된 마음이었습니다
주름살에 배어나는
당신의 모진 세월을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 아려오는 어머니, 어머니
거친 당신의 손 매디 매디에 묻어나는 눈물은
한없는 당신의 사랑이었습니다
까맣게 타버린 당신의 가슴에는
핏 망울이 여기저기 엉켜 있습니다
눈물보다 서러운 것이
자식들의 무관심이었음을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아들은
목놓아 당신을 불러봅니다
나의 영원한 본향이신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끝나지 않는
나의 그리움입니다
사모곡(思母曲) * 2
팔순을 지나면서부터
얼아가 되어 가는 어머니
귀가 순(順)해진다는
이순(耳順)이 지난지도
사반세기(四半世期)이건만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서운해 한다
눈에 거슬리는
가까운 것은 보지를 말고
먼 곳만 바라보라는
노안(老眼)의 지혜(智慧)도
얼아가 되어버린 어머니에게는
소용이 없다
주름살에 배인
인고(忍苦)의 흔적을 더듬던
사내의 손가락은 떨리고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구부러진
어머니의 허리를 부축하는
늙은 아들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힌다
사모곡(思母曲) * 3
갈수록
얼아가 되어 가는
엄니의 골 깊은 얼굴에는
아품과 고통이
미움과 사랑이
덕지덕지 엉켜 있다
늙은 아들은 마주 앉아서
엄니의 주름살에 붙어 있는
세월의 딱지를
핀셋으로 꺼내서
방안에 늘어 놓는다
따스한 봄볕 때문일까....
아픔과 고통의 딱지가
미움의 딱지가 햇볕에 녹고 있다
계곡(溪谷)의 안개처럼 살다
- 무계(霧溪) 고영완(高永完)
조국(祖國)의 광복(光復)을 위해서
말을 남기지 않고(不言)
글을 남기지 않고(不文)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不名) 당신은
이 시대의 진정한 선비였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행실을
드러내라 하였지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당신은
진정한 이 시대의 군자였습니다
일본 유학생과 연희전문학생들이
주축이 된 조선학생동지회
여동생 고완남과 함께 참여하였으나
부친조차 몰랐다던 과묵한 당신은
공사(公私)가 분명한 투사였습니다
치안교란죄라는 죄목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모진 고문을 견뎌내고
1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당신은
용기 있는 조선의 아들이었습니다
건준위 장흥지부장에서
미군정하의 장흥군수로 임명 치안을 감당하면서
무질서한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게 된 당신.
독촉회의 및 족청장흥지부장 재임 중
한민당 소속으로 제헌국회에 출마하여 낙선하자
나라를 위해 또 다른 길을 선택한 당신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선구자였습니다
감찰위원회 정보관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진력을 다했던 시절,
농림부장관의 양곡매입비 조작 유용사건과
상공부 장관의 수뢰 및 국가재산남용사건에 대하여
조봉암 장관과 임영신 장관의 징계를 상신한
감찰위원회의 건의를 이대통령이 거절하자,
감찰위원장 정인보와 함께 사임한 당신의,
당신의 그 용기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민국당 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되자
열정적으로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던 당신은
6.25의 동족상잔의 참극 속에서도
국민방위군 사건을 국회에서 거론합니다.
1・4후퇴 시 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소집된 예비 병력의
수송비용과 식량 등 군수품을 부정 유출 유용하여
수많은 장병들이 굶주림과 질병, 동사(凍死)한 국민방위군사건을
불순분자나 오열의 소행이라고 압박하는 전시권력에 굴하지 않고
부정과 부패의 척결을 요구한 당신의 거룩한 분노를
우리는,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실정인 국민방위군사건을
국회에서 거론, 요주의 인물로 부각되자
제3대,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의 집요한 부정선거로 낙선된 당신은,
막내아들은 대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토지를 학교부지로, 도로부지로 쾌척한 당신은,
이 시대의 진정한 멘토였습니다
살아 생전에
그 흔한 자신의 공덕비 하나 남기지 않았던 당신은,
말(不言)도 글(不文)도 남기지 않고
이름(不名)조차 남기지 않은 당신은,
오늘도 동삿골의 아침 안개가 되어서
우리의 가슴속을 설레이게 합니다
나라의 상앗대가 되어서
-국로(國櫓) 고제환(高濟渙)-
- 1부 -
방패(防牌)보다는 망루(望樓)가 되고 싶었네
나라의 유익한 상앗대가 되고자
34세(1843년)의 나이에 선전관(宣傳官)되어서
여덟살(1843년)에 왕이 된 헌종을 호위했네
열넷의 나이로 헌종(1849년)이 승하하자
보성군수 임명되어 보성땅에 부임했네
안동김씨 김문근(철종의 장인)은
젊은 실학자(實學者) 남병철(南秉哲,1837년 登科)을 유난히 총애했네
훈련대장 김병국과, 대제학 김병학,
좌찬성 김병기의 권세, 막을 자가 없지만
실학자(實學者) 남병철은
눈에 가시였다네
성별(性別)을 바꾸는 일 외
못할 일 없다던 안동(安東)김씨 김병기,
승지(承旨) 남병철
전라감사 감투 주어
외직(外職)으로 쫒아냈네
가시를 뽑아냈네
삼정(三政)은 문란하고
매관매직(賣官賣職) 성행하니
관직을 산 수령들,
백성 수탈(收奪) 여념 없고
고혈(膏血 )짜는 아전(衙前) 횡포
하늘까지 닿았네
부임(赴任)한 고제환,
고을 재정(財政)을 살펴보니
대여(貸與) 양곡(糧穀) 8만석 사라지고 없었네
환곡(還穀) 8만석, 뉘가 착복(着服)하였을까?
군내(郡內) 부호(富豪) 38명, 명륜당(明倫堂)에 소집(召集)하여
환곡(還穀) 8만석 대상(代償)을 강요했네
포탈(逋脫)된 세금징수, 공권력(公權力)을 발휘하자
안동김씨 검은 손이 암암리에 작동(作動)하네
경술복합상소(庚戌伏閤上疏) 빌미삼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전라감사(全羅監司) 남병철(南秉哲), 중추(重推)로 소환되고
부임한지 9개월에 파출(罷黜)된 고제환
삼척부도(三陟府徒) 3년 반에
별세초(別歲抄) 방질(放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네.
- 2부-
가렴주구(苛斂誅求) 세도정치(勢道政治)
삼정(三政)이 무너젔네
매 20년마다 해야 하는
양전(量田)이 실종(失踪)되니
멀쩡한 정전(正田)이
은결(隱結)로 바뀌었네
은결(隱結)에서 거둔 세금(稅金)
착복(着服)하는 수령방백(守令方伯),
이속(吏屬)과 야합(野合)하여 도
결(都結)이 성행(盛行)하니
수령(守令)·이서(吏胥)
횡령환곡(橫領還穀)
수탈(收奪)하는 늑대강징(勒貸强徵)
늑탈(勒奪)하는 세곡작전(稅穀作錢)
인징(隣徵)·족징(族徵)·동징(洞徵)의
가혹한 징포(徵布)제도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
군정문란(軍政紊亂) 끝이 없네
삼정(三政)문란으로
수탈(收奪)이 계속되자
백성(百姓)들이 일어나네
민중(民衆)이 일어섰네
영남(嶺南)에서 붙은 불이
삼남(三南)으로 번지었네
정남진(正南津) 장흥골
풍성한 농수산물로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외
대모갑(玳瑁甲)을 공납했네
대모갑(玳瑁甲)이 귀해지자
수령(守令)·이서(吏胥) 합작하여
대모갑 대신에
대전납(代錢納)을 강요하네
불편함을 해결하는
선행으로 알았더니
4-50량 하던 대전납(代錢納)
해마다 늘더니 3,400량이 되었네
유생(儒生) 정방현(鄭邦賢)과 임재성(任在星)
국로(國櫓)를 찾아와서
수령(守令)·이서(吏胥) 횡포(橫暴)에
울분을 토로했네
임술(壬戌)년 춘궁(春窮)기는
유난히 힘들었네
동헌(東軒) 앞에 모여든 천여명의 백성들
관아(官衙)를 습격하자 목청을 높이자
국로(國櫓)가 나서서
백성들을 막았네
방백 없는 동헌 습격 의미가 없다면서,
이방 주찬우 등 오리(汚吏)부터 찾으라네
하리(下吏) 주신우의 집
파괴(破壞)되어 불에 타자
전라감사 정헌교, 고제환을 나포(拿捕)하여
반란의 괴수로 의금부로 송치(送致)했네
국로(國櫓)가 체포되자, 흥분한 백성들
관아를 습격하여 공해(公廨)를 불태웠네
전라감사 정헌교 민란을 진압하자
향리(鄕吏) 이향유, 수백명을 동원하여
고제환 가옥에 불을 질렀네
정화사 건물이 소실(燒失)되었네
잡초 무성한 빈터
스산한 솔바람소리
그날의 기억, 찾을 길 없고
사랑채 흔적만 가물거리네
상앗대의 꿈을 꿨던
목민관(牧民官) 고제환
두 번의 유배(流配)에도
꺾이지 않았네
65세 늙은 나이
무산도호부사 명을 받고
80세 장수하여 내금위장(內禁衛將) 되더니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자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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