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한 헌사(獻詞)와 아우라(aura)
-고산지의 제4시집《거리》론
채수영(시인.문학비평가)
1.시의 표정 찾기-거울보기
시는 시인의 표정이다. 꾸밀 수 없고 우회가 없는 정신의 내밀한 고백이기 때문에 어떤 계측보다 정확하고 옳다는 점에서 시인이 쓴 시는 곧 시인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이치에 접근한다. 왜냐하면 시는 곧 시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온도계이고 정직한 삶의 표정이 담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시적 장치-비유에의 은유 혹은 직유나 상징 혹은 역설 등의 장치를 통해서 의식을 기록하기 때문에 아주 정밀한 심리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시인은 시적 장치를 통해서 항상 낯설게하기라는 장치를 가동하지만, 시의 특성을 열어보면 거개가 자기를 나타내는 방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진실성에 무게를 갖는다.
자기를 꾸미는 것 혹은 과장하는 것과 진실성은 다르다. 진실한 삶의 바탕위에서 시의 요소로써의 의상을 입는 방법을 갖출 때, 그의 시는 진솔성에 감동이 따라온다. 이런 기저(基底)위에서 시는 곧 그 시인의 자신을 나타내는 그림과 다름이 없다. 시인이자 칼럼니스트 그리고 수필 등 다양한 문학 섭렵(涉獵)의 결과물인 高山芝의 네 번째 시집 《거리》에는 다양한 삶의 이력이 출몰한다. 한 권의 시집에는 시인의 전 삶이 투영되었기에 종합 전시장으로 역할이 나타난다.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 정신의 응축(凝縮)을 나타내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을 보여주는 거울이고 삶의 표정이고 또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의 역할이라면 시인은 온 힘을 다해서 자기를 표현한다. 독자가 한 권의 시집을 읽어야하는 이유가 그런 점에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거울보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거울 속에 시인의 모습을 독자는 자기화의 거울로 환치(換置)할 때, 문학적인 감동에 숨은 교훈적인 가치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거울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1) 거리 조정의 삶
시집 제목인 거리(distance)는 삶과 상관을 갖는 개념이다 가장 가까운 부모나 애인 등의 거리를 위시해서 멀리 사회적 거리에 이르기까지 삶은 곧 거리에 속한다. 이는 관계설정이고 이 한계는 곧 사회생활을 뜻한다. 여기엔 공간(空間)이라는 영역에서 접촉의 빈도와 경계선의 의미로 한정하는 뜻이 내포 된다. 넓게는 국가라는 경계선을 위시해서 좁게는 집과 집 그리고 개인과 개인이라는 경계는 언제나 그리고 항상 의미로 작동된다. 아울러 경계의 침범은 전쟁이나 이기다툼의 살벌한 싸움도 곧 거리에 따른 자기 지키기 혹은 그런 정리에서 비롯된다. 거리에 대한 정리는 Edward T. Hall의 이론이 가장 유명하다. 4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는 자신과 타인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가장 근접의 거리로 15㎝에서 30㎝라고 하면서 남녀 간의 관계나 부모간의 거리를 뜻한다.
2.사적인 거리(personal distance)로는 보통 30~60내지 90㎝ 정도에 해당되며 대개 친한 친구들 간에 있게 되는 거리를 의미한다.
3.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보통 120㎝의 거리로써 사람들이 사회적 상황에서 맞게 되는 거리를 의미한다. 이 같은 거리에서 상거래나 취직면접 혹은 복도나 길에서 인사하고 지나는 거리를 말한다.
4.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는 겨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210~280㎝ 이상의 거리이다. 이에는 사람들의 공적인 모임 혹은 정원을 낀 정도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거리라고 말한다. 고산지의 시로 인용을 풀어나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다가서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거리가 있지요
서로에게 다가가서
모음(母音)은 모음(母音) 끼리
자음(子音)은 자음(子音) 끼리 어우러져
삶이라는 무대를 연출하지요
먹거리를 가진 자 먹거리를 나누고
일거리를 가진 자 일거리를 나누고
근심거리 가진 자 근심거리 나누면서
어우러져 부대끼며
살아가게 되지요
길을 걷다가
낯선 사람 만나면
서로의 거리를 좁혀가며
필요한 거리를 나누게 되지요
다가가 나누면서
함께 걷는 거리에는
우리들의 꿈이 녹아 있지요
우리들의 삶이 녹아 있지요
<거리>
거리(距離)는 접촉에 대한 원근(遠近)이 작용되면서 사회생활의 일들이 파생되고 또 접촉에 따른 친밀도가 나타난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고, 이로부터 희로애락의 일들이 파생되고 인연(因緣)이라는 줄기가 연결고리로 작용하면서 일생을 살아간다. 마지막 시어인 ‘우리들의 꿈이 녹아있지요. 우리들의 삶이 녹아있지요’의 파생은 결국 거리의 조정에 따른 일들이 의미역을 형성한다. 이는 ‘어우러져 부대끼며/살아가게 되지요’의 생활 모습은 자음은 자음끼리와 모음은 모음끼리의 유유상종(類類相從)을 이룩하는 의미로 상징성을 갖는다. 물론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비로소 언어의 기능을 하는 이치를 대입하면 인간의 경우 여자와 남자 또는 해와 어둠이라는 이원성의 결합은 분리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이면서 조화를 상징할 때, 비로소 인간의 삶에 대한 무대는 넓고 깊은 유대로 이어질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접근한다.
나, 거울이고 싶네
숱한 사물 거부하지 않고
보는 대로 보여주는 거울이고 싶네
나, 거울이고 싶네
셀 수 없는 시간 가리지않고
묵묵히 수용하는 거울이고 싶네
나, 거울이고 싶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는 거울이고 싶네
티 없이 맑은 명경지수이고 싶네
<거울>
거울은 자기를 비추면서 자기에 대한 사랑을 돌아보는 자각의 문이 열리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거리가 파생하지 않는 착각의 상징이 숨어있다. 왜냐하면 거리에 접근은 결코 보이지 않고 또 자기와 만날 수없는 절멸(絶滅)의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거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거리가 없는 것 같은 소멸의 장소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울러 진실을 보여주는 점에서 거울은 나르시스의 슬픔도 있지만 나를 발견하는 거리의 소멸에서 나를 찾는 일이 진행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접촉(接觸)이라는 점에서 파생된 거리에의 의혹-자신과 타인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은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기제가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은 언어의 필요성을 가졌고 유용한 수단으로의 언어는 또 다른 거리의 요소가 되는 점에서 표현에의 명료성과 대화의 문제가 나타난다. 아무튼 고시인은 거리에서 그의 시적인 무게를 위해 용해하여 사상의 진화를 꿈꾸고 있음이다.
2) 삶의 무게 내려놓기
삶의 무게는 의식(意識)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짊이지만 의식을 갖지 않을 때는 가장 가벼운 깃털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의식은 얼마나 집중도로 문제 앞에 직면하는 가의 여부에 따른 길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던져진 존재 혹은 태어난 존재는 자발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게 숙명 지워진 존재라는 뜻이다. 하여 세계내 존재의 문제는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운명적인 일들이 결정하는 요소일 때. 종교는 문을 열고 말을 시작한다.
삶을 어떻게 해야 바른 답안이 될 것인가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히 답안을 찾아 방황하고 떠돌면서 해답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일이 곧 삶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파도가 진행할 때, 어떻게 파도에 올라타야 하는가? 대답은 여러 가지가 도출 될 것이다. 그러나 흐름을 이용하는 것은 지혜로 선택하는 파도타기의 방법일 것이다. 적어도 역류의 방법으로는 파도에 결코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순리의 방도라 말한다.
나 비록
가진 것 없어도
모든 것 즐기면서
살고 있다네
‘괜찮아, 괜찮아’ 다짐하면서
거센 세파(世波)에 몸을 맡기네
바람 불면
바람과 더불어 가고
파도치면
파도에 올라타네
거센 풍랑 두려워
움츠린 사람들
세상사는 재미
알 수가 없다지만
나 비록
가진 것 없으나
거센 바람 따라
파도에 몸을 실고
바다 가르는 재미
즐기며 산다네
<파도타기>
파도를 일상의 삶이라 가정하면 온갖 시련의 목록이 한데 뭉쳐서 다가온다. 자칫 잘못하면 죽음이라는 나락(那落)에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피하는 일은 파도에 대한 성질을 이용하여 올라타는 방법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물론 살아가는 것은 지혜이기 때문에 어떻게 파도를 이용할 것인가는 스스로 터득하는 점에서 삶은 곧 자기화의 방법론을 가질 때라야 개성으로의 생활이 될 수 있다.‘파도치면/파도에 올라타네’나 ‘거센 바람 따라/바다 가르는 재미/즐기며 산다네’에 이르면 고산지의 삶은 달관의 모양이 다가든다. 아마 파도의 속성이나 파도의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잇기 때문에 ‘즐기는 재미’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괜찮아. 괜찮아’의 자기 최면을 걸어 스스로를 나아가게 하는 정신의 모둠이 결국 삶의 지혜로 나타나는 것이 고산지의 시적 안도감이자 고달픈 생의 길을 답파(踏破)하는 모습이 의연해진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망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물음은 여러 가지의 답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로 공통된 의미는 더불어 사는 일 즉 조화(調和)에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의 시는 <사랑에 물 들여놓고>이다.
사랑 때문에 만나서
우리 서로 사랑을 한다지만
내 마음에 당신이 물들지 않으면
한 여름 단명(短命)한 햇볕일 뿐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함께 하면서
거친 손, 잔주름에 밴 미운 정 고운 정
서른여섯 해 우러난 새하얀 뭉게구름
찰진 가을볕에 피어납니다
지나온 모진 세월 주마등 같지만
당신은 내 마음에 사랑의 물 들여놓고
천자만홍 빛깔로 사랑의 물 들여놓고
내설악 단풍으로 타오릅니다
3,4,5연을 옮겼다. 바로 조화의 강조이다. 서로가 물이 드는 일이야 말로 사람과 사람의 체온을 하나로 통합하는 가장 쉬운 통합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이 드는 일은 서로의 관계에서 자기를 최소화 할 때, 여분의 공간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너와 나의 공간이 협소할 때, 거기엔 투쟁이나 싸움의 아픔이 도질 뿐 서로의 체온을 감지하지 못하는 결말에서 이기적인 파행을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타적인 삶이냐 자기적이냐 아니면 종교적인 아가페의 자세인가의 여부에 따라서 삶의 색깔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적어도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평범한 사람들은 너와 내가 공존하는 삶의 모습일 때, 사회의 바퀴는 잘 굴러갈 수 있을 것이다.
생활에 꿈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 또 서로간의 관계에서 위로의 문제 또는 공평성의 생각을 실천하는 일 등 인자(因字)에 따라 생의 문제는 다른 풍경화를 연출할 것이지만 양보와 헌신 그리고 순리(順理)를 따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명제일 것이다.
3)사랑의 명제 찾기
인간은 사랑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사랑의 실천에서는 청맹(靑盲)이라는 점을 지적하게 된다. 왜, 그럴까? 삶이란 공간은 너무 넓고 광대무변하기 때문에 객관화의 방법이 묘연하다는 점을 말한다. 너무 흔한 것은 희소(稀少)한 것만 못한 이치를 들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골목길의 어린 사랑에서 부모의 사랑 혹은 이성간의 사랑 등 많은 분류가 가능하지만 정작 사랑의 뜻에는 희생과 헌신이 전제되어야하고 자기를 연소(燃燒)하면서 타는 불꽃과 같은 이미지를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교적인 의미의 경건한(piety)과 헌신(devotion)의 명찰을 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의 사랑은 지고성(至高性)을 목표로 하고 또 경건에서 신과의 대화는 곧 사랑의 전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임무를 실천하기 위해 “나를 따르라”는 절대의 신뢰가 성립된다. 만약 절대의 관계가 없다면 의문부호 속에 인간과 신의 공존은 파행의 길을 재촉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길에 평생을 고개 숙이는 길이 열린다. 이는 곧 구원의 전제가 되기 때문에 사랑 속에서 모든 관계는 진행형을 띤다. 고산지 시인의 시에 가장 많은 빈도의 시는 역시 종교성을 나타낸다. <사랑>,<경음화된 사랑의 노래>,<사랑다운 사랑>,<보시기에 좋은 사랑>,<사랑하기 위하여>,<은혜>,<사명>,<습관> 외에도 많은 시편이 종교적인 색채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항상 갈증을 느끼는 사랑에 목마름을 위해 갈구의 목청이 크다
물은 물이로되 물다운 물이 없네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비 내리는데
넘쳐나는 홍수에 마실 물 없어서
타는 목마름 어찌 할 바 몰라 하네
사랑은 사랑이로되 사랑다운 사랑 없네
유행가 가락 속엔 사랑이 넘치는데
지천에 깔린 것이 사랑이라 하는데
외롭고 허전한 맘 가눌 길이 없네
마실수록 목 마름 더해지는 이치를
움켜쥐면 멀어지는 사랑의 원리를
소음 속에 묻혀버린 세미한 음성을
사람들이 듣지 못해 세상은 모르네
하늘 보좌버리고 성육신 하신 당신
당신은 날 더러 사랑을 나누라네
나눌수록 넘쳐나는 생수가 있으니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이 있으니
먼저 손 내밀고 먼저 나누라네
네가 먼저 사랑하고 네가 먼저 나누라네
<사랑다운 사랑>
앞에서 시인은 사랑의 갈망에 매우 아픔을 갖는다. 즉‘사랑은 사랑이로되 사랑다운 사랑이 없네’‘에서 사랑이 흘러넘치는 세상에 말잔치의 시니컬함을 드러낸다. 그렇다. 진실은 항상 희소하고 목마름은 마실 물이 없는 갈증의 생이 어디에서나 흘러넘치는 말잔치일 뿐이다. 이는 진실이 고갈되었음을 의미하고 사막의 넓이는 점차 넓어지는 사회의 모순의 세태가 클로즈 업 된다. 그러나 시인의 탄식은 대답을 마련하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위로와 안도감 그리고 길에 대한 방법론이 된다.’먼저 손 내밀고 먼저 나누라네/네가 먼저 사랑하고 네가 먼저 나누라네‘에 정답을 마련하는 뜻이다. 부사 ’먼저‘를 실현할 때, 마음을 열어 사랑의 심지에 불을 켜는 일이 시작될 뿐만 아니라 너에게로 전파력을 가질 때, 비로소 세상은 사랑의 충만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받기 위한 사람
세상에 넘치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부족하네
사람들은 모두들
사랑받기 원(願)할 뿐
사랑하는 일에는
인색(吝嗇)하다네
<사랑하기 위하여>에서
말로서의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다. 어딜 가나 사랑 타령은 들을 수 있고 또 사랑의 행위는 저질스럽게 보여지는 풍경이 도처에서 많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에의 갈증은 갈수록 아픔을 준다. 이는 말로만의 사랑-가슴이 없는 사랑의 남발이 주는 상처일 것이다.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진실이라는 의상(衣裳)을 걸치고 서로를 바라보는 체온나누기가 필요한 소이(所以)가 나타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위장과 위선의 사랑이 하루아침에 변절의 표정을 남발하는 세상사의 사랑은 이제 구원의 메시지를 깃발로 들어야 한다. 이는 바로 신의 목소리에 귀를 열 때, 비로소 자기 구원에의 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자기에 의해 구원을 받고 자기에 의해 승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사랑의 중심이 될 때, 세상은 따스하고 화목한 평화의 메시지가 올 것이라 믿는 시인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다. 한 편의 시로 사랑의 진수를 말한다.
믿음의 시루에
소망의 콩을 심고
사랑의 물을 주네
물은 흘러내리는데
떡잎으로 변한 콩
생명을 얻었네
사랑의 힘으로
생명을 얻었네
믿음, 소망, 사랑이
기적을 일구는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네
사랑이라네
<사랑>
기독교에 진수를 말하는 대목이다. 사랑의 가치는 신의 선물이고 이 선물을 어떻게 소화하는가는 곧 인간의 삶에 길이요 구원의 목표에 이르는 빛인 것이다. 이 빛이 보이지만 흔들리는 어둠에서 방황하고 떠돌면서 자기를 방기(放棄)하는 일이 다반사일 때, 혼란의 어둠이 자기를 덮고 또 사회의 모순에 어둠의 깊이에 침잠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사랑의 가치에 시와 그의 삶에 모두를 걸고 호소하는 진지함이 아름답다. 고산지 시인의 시적 임무는 여기서 시인의 소명(召命)이 신으로 향하는 진솔성이 커진다.
4) 친구와 소통
살아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연은 우정을 교류하는 일이 부모와 형제 다음에 있는 우선 목록일 것이다. 만약 친구가 없다면 그의 삶은 고갈된 외로움을 입고 사는 고독한 유형자의 삶일 것이다. “ 한 사람의 벗을!/ 오, 주여! /또 한 사람의 벗을!/ 수많은 벗을 가지는 자는 /한 사람의 벗도 가지지 못할지니 ”는 .W.L 클라임의 시에 있는 말이다. 진실한 한 사람의 벗이면 세상은 너무 따스하고 진실이 물결로 출렁이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여 친구의 필요성은 자기를 위한 몫이 된다.
나에게는 죽는 날까지 동행해야 하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림자처럼
한 시도 떨어질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디딤돌이지만
때로는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입니다
결단과 의지력에 힘입어
성공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파멸로 이끌기도 합니다
....생략.....
단호하게 통제하며
길들여진 친구와 함께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지금 가고 있습니다
<습관>에서
친구는 인생의 길에 동반자 혹은 비판자일 때, 가장 좋은 이름을 얻을 수 있다. 논어에 익자삼우(益者三友) 손자삼우(損者三友) 역시 충고와 비판을 할 줄 아는 것과 필요성의 궤(軌)를 같이 한다. 영국의 속담에 “친구의 실책에는 눈을 감으라 ,그러나 악덕에는 눈을 감지 말라’는 말에 서로 상통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좋은 결과로 살아가기 위한 고언일 것이다. 전자의 강조는 성공의 동력을 조언하는 말이지만 후자일 경우는 파멸이 곧 죄악의 어둠에 잠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좋은 친구를 만나기 어려운 것은 자기 성찰이 부족함이고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는 비난을 수렴하는 정신이 살아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예화일 것이다. 참된 사랑이란 고언(苦言)에 담겨진 진주와 같은 의미일 것이 곧 진정한 우정의 이름일 것이다.
시는 이미지의 구축이다. 이미지는 세 가지로 분류한다. 시인이 원래 작품 속에 표현 하고자 하는 의도적 의미(intentional meaning)와 작품 속에 실제로 표현된 실제적 의미(actual meaning) 그리고 독자가 해석한 의미(significance)로 나뉘지만 셋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용운의 님을 조국, 임 그리고 부처님으로 각기 해석하는 이치와 같다. 이를 일러 시는 ambiguity(애매성)를 본질로 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습관>이 자아에 따라 오는 분리할 수없는 그림자라면 실제의 친구는 <친구.2>에 구체화된다.
해닥사그리한 친구 그리워
청계천 뒷골목 찾아갔네
우럭우럭한 그 모습
소주잔에 띄워놓고
지난 날 함께 마신 정겨운 유희(遊戲)
간잔지런 그 얼굴 눈에 선하네
거나하게 취한 그는 얼근덜근 거리네
어께동무하고서
골목길을 걷던 친구
해말간 그 친구
지금은 볼 수 없네
시신(屍身)을 기증한 후
장례조차 거절했네
그가 쓴 시(詩)만 남아
술잔 위를 넘실대네
<친구.2>
과거 시인과 함께 동인 활동을 했고. 지난 시절 긴급조치에 악명 높은 남산 안기부와 서소문 보안사 분실에서 조우(遭遇)한 각별한 친구 박영웅시인의 정이 시인의 가슴에 새겨있어 그리움을 부추긴다. 시대의 곤고(困苦)한 아픔을 함께했고, 지울 수없는 추억이 청계천변 허름한 술집에서의 소주 잔 위에 파문으로 어른거리는 회상이 슬픔으로 일렁거린다.
술에 취하면 친구의 모습은 더욱 심성의 본질을 만나게 된다. ‘어깨동무’로 골목길을 걷던 시절—그 친구는 ‘지금은 볼 수 없네’에서 애잔한 심사에 곧고 깨끗한, 투명의 우정이 새삼 그리운 물살로 다가들 때, 친구의 시(詩)만이 남아 위로의 목록으로 기억을 새롭게 한다.
어둠에서 불빛을 보면 누구나 안도감을 갖고 그곳을 향하는 일광추향행동이 예비 된다. 빛은 곧 생의 양지이고 이를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진리의 추구와 같다는 뜻이 담겨졌다는 의미이다.
나, 주 안에서 빛이라
세상을 밝히는
빛의 자녀 되었지만
나 혼자선
선(善)을 행할 수가 없네
등잔없인 등불을
켤 수 없드시
심지없인 등잔불을
켤 수가 없네.
<둥잔불>에서
시인의 생각은 오로지 주 안에서 생각하고 생활하고 또 삶의 지표(指標)를 둘 때, 그의 시는 빛나는 영지를 찾아가는 발길이 뚜벅거린다. 이는 주님을 친구로 생각할 수도 있고 더 높은 이름으로 설정할 수도 있지만 친구-가장 가깝고 친근함을 준다. 때문에 고산지 시인의 시는 주 안에서 오로지 사고의 넓이를 개척하는 일이 헌신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어딘가 의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길이 나타난다면 고시인은 주에 모든 거치를 잇대는 삶의 모습이 환하게 빛나는 등불-심지(心地)의 역할이 주로 형상화 된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의 주님에 대한 경외가 시의 심도를 더하는 빛이 난다. 스스로 등불을 켜는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5) 역사인식과 꽃의 이미지구축
역사인식은 곧 살아있음을 깨닫는 행위라면 고산지 시인은 무궁화에서 우리의 역사를 유구한 높이까지 천착(穿鑿)하는 수고로움이 꽃으로 상징된다. 왜냐하면 무궁화는 곧 우리의 꽃이자 나라를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인식이자 민족의 자존을 추구하는 정신이 공고함을 의미한다. 꽃의 상징은 곧 우리의 길로 이어지고 이 꽃의 고귀성은 민족의 자존으로 길을 내기 때문에 상징으로 꽃은 곧 우리 자신을 형상화하는 의미에 가깝다. 이는 반만년의 긴 시간을 이어왔고 또 앞으로 이어질 숙명의 이름과 함께하는 꽃-단순한 의미의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날마다 죽는 몸
서러울 법(法) 하건만
날마다 새로워지는 꿈
반만년(半萬年)을 이어왔네
해돋는 근역(槿域)땅에
아름다운 목근화(木槿花)
붉고 하얀 꽃술 속에
민족(民族) 얼이 살아있네
<무궁화>에서
꽃에 혼을 투영하는 것은 상징이 갖는 장치이다. 그러나 이 장치 속에 다시 혼을 담아놓을 때, 살아 영원으로 흐르는 길이 만들어진다.<무궁화1~5>의 연작시는 바로 민족애를 표현하려는 시인의 역사인식이다. 영원을 이끌고 당도할 목적지는 아득하지만 민족사의 부침에 따른 아픔도 감내하면서 미래로 길을 내는 일은 우리들의 숙명이자 당도한 꿈의 이름이다.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동열에 놓는 것은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의 높이세우기라는 점에서 무궁(無窮)해야 하는 뜻, 곧 민족의 자존심을 치켜세우는 일이면서 또한 시인의 소중한 임무로 보인다.
고산지의 시에는 꽃에 대한 언급이 많다.<무궁화.1~5>와 <봉선화1~2>,<무화과>,<상사화>,<선암사 꽃무릇>,<진달래꽃>,<매발톱꽃>,<들풀>등으로 정서를 압축하고 있다
부대끼며
쓰러지는 들풀을 보라
흔들리며
뿌리내린 끈기 있나니
바람 자면
일어나는 생명을 보라
흔들리며 성장하는
믿음 있나니
역경을 극복하는
소망 붙들고
환란 속에 꽃피우는
사랑 있나니
바람 자면
부활하는 풀꽃을 보라
부대끼며
쓰러지는 들풀을 보라
<들풀>
김수영의 꽃의 이미지를 닮고 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바람이 지나면 다시 일어서는 이미지가 들풀의 생리이면서 이를 사람으로 바꾸면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 이는 곧 승리자의 원인이고 이 동력이 곧 삶의 길이라 해석하면 승리는 예약된다는 가정법이 현실화될 것이기 때문에 승리의 예약이 다가온다. 고시인은 이런 정신의 깊이를 그의 시에 담고 있어 맛깔스런 정취를 나타낸다. 이는 정신이 갖는 개성이자 시적인 묘미에서 달성된 의도의 승리일 것이다. 들풀이 갖는 상징은 개인의 상징이자 민족의 에너지를 승화할 수 있는 동력이라는 점에서 고귀한 시적 장치일 것이다.
3. 거리에서 다시 의식의 깊이로
모든 시에는 맛이 있다. 이 추상적인 표현을 바꾸어 말하면 흔히 어머니 맛이라 부르는 느낌은 시에서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의 손맛은 곧 구수하고 애정이 담겨있고, 또한 따스함을 간직한 의미를 일컬을 것이다. 고산지의 제4시집은 그런 느낌을 강조하게 된다.
거리(距離)의 미학이 주요 목록으로써 시적 바탕에 깔고 시적 여정은 매우 진지하고 숙연함을 강조한다. 이는 그 바탕에 사랑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여기서 삶의 진지성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멀리 손짓을 보낼 때, 독자는 안도감을 느끼어 시적 뉘앙스에 접근하면서 그의 손짓을 따라가게 된다. 이는 안도감을 넘어 기쁨을 주는 요인을 갖는다.
삶에 대한 성찰은 진솔함에서 성실의 목록이 나타나고 우정의 목록에서 끈끈한 정감이 유난하다. 역사인식은 무궁화로 무한한 역사적인 시간을 강조하면서 미래의 길이 강조점으로 보인다. 꽃에 대한 관심은 시의 화장끼를 더욱 윤나게 하는 묘미로 작동되면서 그의 의식이 지향하는 아름다움의 추구와 맞물리는 정서의 표정이 향기로 환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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