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포르투갈 편 -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1>

高 山 芝 2019. 1. 29. 10:55

*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1>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포르투갈편 고 산 지


계간문예와 한국문학발전포럼이 주최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문학기행, 유라시아의 동쪽 끝 한반도에서, 서쪽 끝 이베리아반도로 이어지는 8박 10일간의 긴 여정이 오늘(5원3일)부터 시작되었다. 인천공항 제2터미날에서 여행가방이 열리지않자 “집에서는 잘 열렸는데 허참”하며 애를 태우는 정종명이사장, 비밀번호를 우에서 좌로 입력해 놓은 설레임이 만든 작은 헤프닝이었다. 참가자 36명 중 별도로 출발한 3명과 파리에서 합류하여 최종 목적지인 리스본 행 비행기로 환승했다. 리스본에 도착한 후, 기다리고 있던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천주교의 성지인 파티마까지 버스로 이동 호텔에 도착하자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아침식사 후 호텔 지하에 마련된 세미나실에서 <지중해 문학 - 세르반테스와 주제 사마라구를 중심으로>으로, “돈키오테와 미겔 데 세르반테스”에 대한 강외숙 시인과 주제 사마라구에 대한 “보이면 보라,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라”라는 금동원 시인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호텔 바로 앞에 있는 파티마 성당의 광장, 높이 65m의 대형 십자가가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파티마는 다음과 같은 전설때문에 ‘로자리오 성모’ 숭앙의 근원지인 가톨릭 성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때인 1917년 5월 13일, 파티마의 코바 다 이리아에서 양을 치고 있던 3명의 목동(?) '루치아(10세), 하친타(7세), 프란시스코(9세)' 등 3명의 어린이 앞에 발현한 성모 마리아로부터 앞으로 5개월 동안 매월 13일 평화를 위한 로자리오의 기도를 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로사리오’란 라틴어의 ‘로사리움 - 성모께 영적인 장미꽃다발을 바친다는 뜻 - 에서 유래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행적을 묵상하는 기도인 ‘묵주(默珠)의 기도’ 또는 묵주를 일컫는 말이다. 6월 13일, 성모 마리아가 다시 발현하여 3명의 이린이에게 세 가지 예언을 한다. 그 중에는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다. 어른들은 세 어린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소문은 꼬리를 물고 확산되었다. 10월 13일, 파티마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찬란한 빛이 발하면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1930년 레이리아의 주교는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바티칸의 명으로 이곳에 대성당을 건축했다. 파티마는 프랑스의 루르드와 함께 성모발현의 2대 성지로 꼽혀서 해마다 수십만 명의 참배객이 이곳에 모여든다. 성모 마리아의 예언 가운데 제1의 예언(1차대전의 종결)과 제2의 예언(2차세계대전의 발발 및 소련의 대두와 몰락)은 1942년 바티칸에 의해 공표됐으나, 제3의 예언 내용은 성모의 고지(告知)로 1960년까지 발표하지 않았다. 이러한 바티칸의 비공개 방침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주장하는 이단(異端)들을 양산했으며, 1981년에는 계시 내용 공개를 요구하는 항공기 납치 사건까지 발생했다. 2000년 5월, 교황청은 마지막 계시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암살 기도’였다고 밝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인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총격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2년 5월 13일, 감사 기도차 파티마 방문시 일어났던 스페인 광신도의 암살 기도를 모면한 바 있다. 당시 3명의 어린이 중 프란시스코와 하친타는 1919년과 1920년 스페인 독감으로 각각 숨졌으나, 2000년에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로 시복됐다. 루치아의 경우 1929년 수녀가 된 뒤 파티마 인근 카르멜리테 수녀원에서 신앙 생활을 계속하다가 2005년 9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어서 찾은 까보 다 로까(Cabo Da Roca)는 해발 140미터의 절벽위에 있는 단촐한 등대와 카페가 딸린 관광 안내소, 그리고 돌로 쌓은 십자가 기념탑이 전부인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의 작은 마을이다. 절벽 위에 세워진 십자가 첨탑에는 포르투갈의 국민시인(詩人) 루이스 드 까몽스가 그 자리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썼다는 싯귀의 한 구절이 세겨져 있다.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1572년에 발표된 까몽스의 대표작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 국민의 정신적인 성서(聖書)”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은 포르투칼인의 선조인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살았던 주신(酒神) 바쿠스의 아들인 루조의 자손인 루지다니아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가 노래하고 있는 것은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가마의 첫 번째 원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포르투갈의 역사에 신화(神話)를 융합시켜 웅장한 위대함을 서사시로 풀어냈다. 11음절의 8연시(聯詩) 10편, 전부 1,102절(節)로 되어 있는 <우스 루지아다스>에서 까몽스는 본인이 겪은 아프리카와 인도의 경험에 상상력의 수(繡)를 놓아 화려한 서사시로 직조하였다.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K.롤링은 포르투갈의 제2의 도시 포르투에서 영어 강사를 했다. 그녀는 포르투의 한 서점에서 영감이 떠올라 〈해리 포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포르투의 라틴어 이름 "포르투스 칼레"에서 유래된 포르투갈, 이베리아반도의 서쪽에서 선사 시대부터 거주했던 갈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 같은 켈트인들은 로마인인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후 수에비족과 서고트족 같은 게르만족이 정착했으나, 8세기부터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왔다. 레콘키스타(카돌릭의 국토회복운동)도중에 갈리시아 왕국에서 레온 왕국의 일부로 편입된 포르투갈은, 1095년 프랑스 왕족 앙리 드 부르고뉴가 포르투갈 백작에 봉해진 후, 그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시가 테호강 북쪽을 평정하여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하여 1143년 포르투갈왕(王)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15세기와 17세기 대항해(大航海)시대의 탐험 결과물로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는 식민지제국을 건설하였다. 1415년 세우타 정복부터 1999년 마카오의 중국 반환까지 거의 600년 동안 이어진 식민지 포르투갈 제국은, 15세기 해양 왕 엔리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바다를 무대삼아 정복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코 다 가마 등 유명한 탐험가들이 뒤를 이었다. 새로운 땅의 발견과 해양 무역으로 전성기를 이루면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인도와 브라질 그리고 멀리 중국의 마카오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고 해양 무역을 독차지 하면서 제국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16세기 말 스페인의 침공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그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전쟁과 혁명, 내란 등의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 파탄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독립 후에도 지금까지 예전의 경제적인 부를 되찾지 못했다.

 

위대한 해양 탐험가들과 금과 향료를 실은 보물섬의 행렬은 사라졌지만, 그 바다에서 지금도 변함없이 검푸르게 출렁이고 있는 파도(波濤)는, ‘파두(Fado)’의 리듬을 타고 포르투갈 사람들의 영혼에 깊숙히 스며들었다. 이들의 전통음악인 파두는 변할수 없는 냉혹한 숙명의 삶을 의미 한다. 바다를 소재로 한 파두의 노래 말에는 포르투갈 여인들의 사랑과 슬픔, 이별과 애환이 담긴 이들의 애달픈 삶이 배어있다. 사랑하는 남편을 모험의 바다로 떠나보내고 무사히 돌아 올 날만을 기다리던 아낙네들에게 어느날 육지를 향해 돌아 오는 배가 보이기 시작했다. 기쁨으로 달려 나가지만 배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검은 돗배를 달고 슬픈 소식을 전해온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어 돌아오는 검은 돗배를 숨죽이며 기다려야 하는 여인의 아픔을 파두의 여왕 ‘아멜리아 로드리게스’는 슬픔을 토해 내듯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청중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리스본으로 돌아와 포르투칼 전통음식인 바깔랴우로 점심식사를 한 후 주제 사마라구 기념관을 찾았다. 리스본 구, 도심의 중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동쪽으로 3백 미터 가량 가면 ‘뾰족코의 집(Casa dos Bicos)’이 보인다. 그 앞에는 올리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사랑과 미움을 한 몸에 받았던 주제 사마라구가 그의 소원대로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 잠들어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는 스스로를 무신론자이며 염세주의자로 정의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학업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던 사라마구는 일찌감치 자동차 정비소에서 정비공으로 일했다. 그는 밤마다 리스본의 중앙시립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문학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1947년에 첫 작품인 소설 <죄의 땅>을 발표하지만 두 번째 작품 출판이 좌절되었다. 그 후 몇 년 간은 시작(詩作)에 열중하면서 출판사에서 편집과 번역 일을 하다가 신문기자가 되었다. 열렬한 무정부 공산주의자인 그는 이 시기 문학보다는 살라자르(Salazar)의 독재에 대한 정치비평에 몰두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살라자르의 독재체제는 끝이 나지만, 포르투갈은 새로운 사회를 정립하는 문제를 놓고 극심한 혼란의 1년여를 보냈다. 새좌파정부와도 대립각을 세우게 된 사라마구는 1975년 신문사 부편집장에서 해임되고, 더 이상은 일을 찾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 사건은 그가 저널리스트에서 소설가로 돌아오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인데, 그 후에 쓰여진 사라마구의 작품들이 그에게 본격적으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1991년 예수를 새롭게 그려 낸 <예수 그리스도의 두번째 복음> -한국 ‘예수복음’으로 번역출판- 이 출판되자, 가톨릭 교황청과의 갈등이 심화되는데, 가톨릭 커뮤니티의 영향권 아래 있던 포르투갈 정부는 사라마구의 작품이 유럽 문학상 후보에 선정되지 못하도록 정치력을 행사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사라마구는 유배라 표현하며 스스로 포르투갈을 떠났다. 사라마구는 그의 아내이자 스페인 저널리스트인 필라르 델 리오 와 함께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의 란사로테에 정착했고, 생의 마지막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한 도시 전체에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퍼진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확실하지 않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 또한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수용소에 강제 격리되어 각자의 이익을 챙기는 눈먼 사람들, 이들에게 무차별하게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폭력, 전염을 막기 위해 수용 조치를 내린 냉소적인 정치인, 범죄 집단을 방불케 하는 폭도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주제 사라미구의 기념관이 된 ‘뾰족코의 집’은 1523년에 지어진 귀족 저택이다. 브라스 드 알부케르크는 몇 년 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건축에 심취했었는데, 자신의 저택을 짓게 되면서는 특히 이탈리아 페라라에 있는 디아만티 저택을 모델로 삼기를 원했다. 건축가 비아지오 로세티(Biagio Rossetti)의 작품인 디아만티 저택은 다이아몬드형(피라미드형)으로 튀어나온 돌장식들로 인해 이름도 디아만티, 즉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저택이다. 디아만티 저택을 본딴 다이아몬드 형의 돌 부조장식으로 입면이 이루어지고, 창문들의 자유로운 배치는 당대의 양식인 마누엘 양식 - 포르투갈 후기고딕양식의 하나로, 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인 동 마누엘 1세의 이름을 딴 건축양식 - 을 따르는 저택이 리스본 떼주 강변에 세워지게 되었다. ‘뾰족코의 집’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 2, 3층 부분이 무너진 채로 간신히 살아남아 바깔랴우(소금에 절인 대구)창고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 리스본시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이 창고를 인수하여 포르투갈 대항해시대를 기념하는 국가위원회에서 사용하다가, 2008년 주제사라마구재단에 운용을 맡길 것을 결정하게 되면서 건축가 마누엘 빈센트(Manuel Vicente)에 의해 내부공간이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

버스를 타고 외관만 바라 본 벨렘탑,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벨렘탑은 4층의 등대로 1515∼1521년 프란시스코 데 알다가 가마의 업적을 추모하여 건물 모퉁이마다 감시탑을 세우는 형식으로 지었다. 포르투갈 특유의 마누엘 양식을 띠고 있으며 밧줄·조개·바다풀 등의 장식을 새겨넣고 총안을 둔 흉벽 등을 설치하였다. 탑의 안뜰에는 '성공의 성모' 조각상과 인도 양식의 작은 첨탑을 설치하였다. 지하감옥 위에 있는 '총독의 방'은 고딕 양식으로 꾸몄고, '찬란한 방'이라는 거실도 만들었다.

 

세계에서 마누엘 양식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마누엘 1세가 선조인 항해왕 엔리케를 기리기 위하여 1502년 착공하여 1551년 완공하였다. 석회암으로 된 건물은 1변의 길이가 약 300m에 이르며 웅장하고 화려한 노르만 고딕양식을 띠고 있다. 수도원의 산타마리아성당 파사드 가운데에는 마누엘 1세와 왕비 마리아, 성제로니무스, 세례 요한 등의 조각상이 있고, 남문 회랑에는 후기 고딕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성인과 고승들의 조각상 24개가 세워져 있다. 수도원 왕실묘지에는 마누엘 1세와 왕비의 돌널, 바스쿠 다 가마와 루이스 드 카몽이스 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제로니무스는 2층짜리 수도원처럼 당시로서는 과감한 설계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