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이베리아 반도의 신화 편 -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3>

高 山 芝 2019. 2. 24. 20:02

*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3>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이베리아 반도의 신화 편, 고 산지

 

세비아는 헤라클레스의 도시이다. 아주 먼 옛날에, 오른손에는 창의 종류인 트라이던트, 왼손에는 돌고래를 잡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포세이돈은 신들의 왕인 크로노스의 아들 중 하나로 형제들과 함께 세계를 분할 통치하고 있었다. 제우스는 대지를, 하데스는 지하세계(저승세계)를, 그리고 포세이돈은 바다를 지배하는 신이었다. 어느날 신(神)들은 포세이돈에게 아틀란티스 섬을 관장하도록 결정했다. 아틀란티스 섬에는 대지에서 태어난 한 쌍의 인간과 그 외동딸인 크레이토우가 살고 있었다. 부부가 죽자 크레이토우와 결혼한 포세이돈은 아틀란티스 섬의 언덕 주위의 땅을 깍아서 바닷물을 끌어 들였다. 그 결과 섬의 형상은 중앙부를 축으로 하여 둥근 모양의 육지가 이중으로 바다가 둘러싸는 형상이 되었다. 배나 항해술을 전혀 몰랐던 당시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크레이토우가 살고있는 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포세이돈은 그곳에 온천과 냉천(冷泉)이 솟아나는 두 개의 샘을 파고 대지에는 모든 종류의 작물이 풍성하게 열매 맺도록 했다. 이곳은 나중에 중앙섬이라 불리면서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포세이돈과 크레이토 사이에서 다섯 쌍의 쌍둥이 아들을 탄생했다. 포세이돈은 아틀란티스 섬을 10등분하여 아들들에게 물려주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이 그들의 지도자, 즉 왕 중의 왕이 되었다. 아틀라스(Atlas)라는 그의 이름을 따서 섬의 이름을 아틀란티스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틀란티스 섬 주변의 바다를 아틀란틱(Atlantic, 대서양)이라고 불렀다.

 

메두사를 죽인 뒤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는 온 세계를 날아다녔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페르세우스는 해가 떨어지는 서쪽 끝에 이르렀다. 페르세우스는 그곳에서 아침까지 쉬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은 아틀라스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아틀라스 왕은 거인으로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은 힘이 센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자랑하는 것은 황금 과일이 열리는 뜰이었다. 과일은 황금빛 가지에 매달린 채 황금빛 잎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아틀라스 왕에게 말했다. “저는 제우스 신의 아들입니다. 혹 위대한 공적을 이룬 자(者)를 후하게 대접하신다면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고르곤을 퇴치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바라건대 하룻밤 유숙할 것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람니다” 아틀라스 왕은 옛날 자기에게 내려진 신탁이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 제우스의 아들이 황금 사과를 빼앗아 갈 것이라던 신탁을 되새기며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의 허장성세나 가문의 자랑도 그대를 지켜 주지 못할 거네” 아틀라스는 페르세우스를 밖으로 밀어냈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안 페르세우스는 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우정을 그렇게 싸구려로 밖에 쳐주지 않으니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제 얼굴을 돌리면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 머리를 쑥 내밀었다. 그러자 아틀라스의 거대한 몸이 돌로 변했다. 수염이나 머리카락은 숲이 되었고, 팔과 어깨는 절벽, 머리는 산꼭대기, 그리고 뼈는 바위가 되었다. 몸의 각 부분은 마침내 거대한 산이 되기까지 부피가 시시각각으로 커지자 뭇 별들을 거느린 하늘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제우스와 알크메네 - 미케네 3대 왕 엘렉트리온의 맏딸로 어머니는 페르세우스의 아들 알카이오스의 딸 아낙소 -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를 태어나기 전부터 헤라는 증오했다. 헤라클레스가 태어나기 직전, 제우스는 곧 태어날 페르세우스 - 메두사를 죽인 제우스의 아들 - 의 후손이 미케네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 헤라는 출산의 여신을 부추겨 헤라클레스의 출산을 늦추고 에우리스테우스의 출산을 앞당겠다. 제우스가 말한 예언의 혜택은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돌아갔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헤라클레스에 대한 증오와 시기심, 열등감과 공포심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 헤라의 계략으로 자식들을 죽인 헤라클레스는 자식을 죽인 죄에 대한 업보로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에 복종하면서 그가 시키는 12개의 과업을 수행하게 된다.

 

'열두 가지 과업' 중 열한 번째 과업이 서쪽 끝에 있는 비밀의 정원(헤스페리데스의 정원 또는 경이의 뜰)의 정원에 있는 '황금 사과'를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였다. 그 뜰은 아틀라스(Atlas: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신)의 일곱 명의 딸들인 헤스페리스(Hesperis: 복수형은 헤스페리데스) 자매와 100개의 머리를 가진 불사(不死)의 용 라돈이 지키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비밀의 정원을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 제우스가 감추어 둔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줌으로써 인간에게 맨 처음 문명을 가르처준 신(神) - 로부터 비밀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비밀의 정원 경비가 삼엄하여 ‘황금사과,를 훔쳐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략을 꾸몄다. 헤스페리스 자매의 아버지인 아틀라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헤라클레스는 아틀라스에게 간청했다. "제가 대신해서 하늘을 받치고 있을 테니 황금 사과를 가져다주십시오." 영겁(永劫)의 고통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해방되는 것을 기뻐한 아틀라스는 곧바로 딸들이 사는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으로 가서 사과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아틀라스는 하늘을 되돌려 받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에 자신이 사과를 운반하겠다고 우겼다. 헤라클레스는 승낙하는 척하며 하늘을 지탱하는 머리 위의 받침을 고쳐야겠으니 잠시만 하늘을 들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아틀라스가 하늘을 받아든 순간 슬쩍 몸을 피해서 사과를 들고 그대로 그리스로 돌아가버렸다. 이 '황금 사과'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왕비 헤라와 결혼할 때 대지의 모신(母神)인 가이아가 선물한 신비의 나무에서 나는 과일이다. 후세의 연구자들은 그 실체는 오렌지였다고 가정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렌지라는 존재를 몰랐다. 달콤함과 신맛이 어우러진 맛있는 과일이 풍성하게 열리는 낙원이 서쪽 끝에 있다고 했는데, 그 땅이란 아마도 스페인의 그라나다 또는 카디스 같은 실재(實在)의 장소는 아니었을까?.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 429~BC 347)이 남긴 두 편의 대화록(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에 나오는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이야기이다. “그리스의 일곱 현인(賢人)중 한 사람이자 정치가로 알려진 솔론은 어느 날 그리스 신전의 늙은 사제로부터 사라진 대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스인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부르던 지브롤터 해협 저편에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의 섬이 있었다. 그 땅은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합쳐놓은 것처럼 광대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강대하고도 견고한 제국이 이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 주변의 많은 섬들이나 바다 저편에 있는 대륙의 대부분과, 지브롤터 해협 이쪽으로도 많은 지역을지배하고 있었다. 아틀란티스는 풍부한 천연 자원으로 도시와 항구는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대지진과 대홍수로 인해 아틀란티스 섬은 하루 낮밤 사이에 사람들과 토지 모두 바닷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인류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아틀란티스인에 의해 멕시코 만, 미시시피 강, 아마존 강, 지중해, 유럽, 아프리카의 서안, 발트 해, 흑해, 카스피 해 등 주변 국가에 문명이 전파되었다. 이것이 바로 대홍수 이전의 세계로 ‘에덴 동산’, ‘엘리시온의 들판’, ‘알키누스의 나라’, ‘메솜팔로스’, ‘올림푸스’, ‘아스가르드’ 등과 같이 전설상의 낙원일 것이라고 짐작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인도인 등이 숭배하던 신들은 아틀란티스의 왕이나 영웅들의 이름이었으며, 이집트나 페루의 태양 숭배 신화는 아틀란티스에서 기원한다. 역사학자들은 아틀란티스 인에 의해 건설된 가장 오래된 식민지가 이집트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유럽의 청동기 시대의 기물 제작법은 아틀란티스에서 전수되었으며 알파벳이나 페니키아 문자, 마야 문자까지도 아틀란티스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1958년 스페인 남부도시인 세비야의 교외 지역인 카마스에 레저 센터를 짓기 위해 토대 작업을 하던 인부들에 의해 기원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날의 금 세공품과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다. '테소로 델 카람볼로'(카람볼로의 보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스물한 점의 귀금속들은 기원전 700년경에서 500년경까지 스페인 남부에서 꽃을 피웠던 타르테수스 문명 시대의 유물로 밝혀졌다. 그리스나 마케도니아, 로마,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등과 비교해서 당시까지만 해도 이베리아(고대 스페인)는 자랑할만한 문명이 없었다. 하지만 카람볼로의 보물'은 이러한 선입견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리스 신화속에 존재했다고 생각한 '게리온 의 타르테수스 왕국'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베리아 서쪽부근의 '초고대 문명'인 아틀란티스와 지리상 위치가 흡사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타르테수스 문명이 아틀란티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추측한다. 타르테수스인들은 '주석(금속)'의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묘사는 아틀란티스인들이 '오리할콘'이란 원석으로 왕국을 통치했다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타르테수스인들의 황소숭배 사상 또한 아틀란티스인들의 황소숭배사상과 동일하다.

 

게리온은 포세이돈과 메두사의 아들인 크리사오르와 오케아노스의 딸인 칼리로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지중해 서쪽에 위치한 신화적인 섬 에리테이아에 사는 무시무시한 동물로, 세 개의 머리와 인간의 얼굴을 가진 괴물이다. 리비아 사막을 지나던 헤라클레스가 이 섬에 들어가 독화살을 쏘아 게리온의 머리를 맞혔다. 신화에서 언급한 지중해의 끝에 있다는 에리테이아섬을 그리스인들은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타르테수스와 연결했다. 타르테수스는 페니키아인이 처음 당도하여 원주민과 함께 문명을 일으킨 곳으로, 세비야를 모두 포괄하는 지역이다. 게리온이 죽자, 치피오나의 셀미디나 암초에 만들어진 게리온의 무덤 위에 등대를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 전설때문일까? 스페인 정부은 과달키비르강에 접근하는 배가 암초와 충돌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1867년 세비야 남쪽 대서양해안에 유럽에서는 세 번째로 높은 치피오나 등대를 만들었다. ‘치피오나’는 로마 영사관 카이피온(Caepion)의 명령에 따라 기원전 140년 건설된 등대에서 비롯되었다.

 

헤로도토스(역사학자)등의 기록에 의하면, 타르테수스는 왕정국가였다. 타르테수스왕은 '주석의 섬' 콘월제도(영국)에서 원주민으로부터 값싸게 사들인 주석 -항로 타르테수스 주석루트 - 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타르테수스 왕국은 기원전 1100년경부터 나타나 기원전 600년경엔 전성기를 누리다가 기원전 500년에 갑자기 사라졌다. 학자들은 타르테수스 왕국의 멸망의 배후에는 '카르타고(Carthage)'가 있다고 추측한다. 당시 타르테수스는 주석의 중계무역을 통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타르테수스의 주석거래는 천부적인 상인들인 카르타고인을 통해 어루어졌다. 역사학자들은 주석무역의 독점을 위한 카르타고인들과 타르테수스인들의 전쟁으로 타르테수스가 명망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300여군데의 타르테수스인들의 주거흔적은 발견되었는데, 찬란했던 왕궁과 항구도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않고 있다. 그러나 카르타고인들이 타르테수스인들을 멸망시켰다는 중요한 단서중 하나는, 타르테수스인들만이 알고있던 '주석 루트'를 '타르테수스 멸망 당시 카르타고인들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5세기경 카르타고의 항해사 히밀코(Himilco, Navigator)가 콘월제도 향했던 항해는 '타르테수스인들의 주석루트'와 동일하다. 타르테수스는 멸망한 후, 이베리아(스페인)남부엔 카르타고의 식민지가 자리잡게 된다, 한가지 더 확실한 것은, 기원전 480년경, 타르테수스인들의 루트를 탈취한 카르타고 항해사 히밀코의 항해는 대륙의 큰섬(브리튼 섬)을 문명세계로 알림으로서, 훗날 영국으로 변모될 '브리타니아 섬의 존재'가 세계 최초로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카르타고” 또는 포에니(Phoenica) 라고 불리는 페니키아를 성경은 두로과 시돈으로 기록하고 있다. 헤브라이인 ·아람인과 함께 셈족의 가나안계(系) 혼혈로 이루어진 페니키아는 기원전 2000년 경, 지중해 동쪽의 시리아 중부 지방에 건설한 도시 국가였다. 향해술이 뛰어나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통일된 적은 없었다, 시돈(사이다) ·티루스(티레) 등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도시연맹의 형태를 유지한 페니키아는 BC 3000년 경에는 이집트와의 통상이 활발하였으나, BC 2000년에 들어서면서 아리아계(系) ·후르리계 ·가나안계의 소도시 국가군(群)이 분립(分立)했다. 최고(最古)의 문자 알파벳이 성립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세력 아래 놓인 시기도 있었으나, 강국들 사이에서 살아 남은 페니키아는 BC 13세기, ‘바다의 민족’에 의해 모든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도 티레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북안(北岸)에 우티카 ·카르타고와 에스파냐의 가데스 등에 식민시를 건설하여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한 페니키아는. BC 480년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했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페니키아)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서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다. BC 310년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하였다.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시칠리아의 패권을 확립했으나 에피루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로마와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전쟁 후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이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다. 약 5세기 동안 지중해의 주인이던 상업국가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남하해 오는 로마에 의해 무참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대 페니키아인이 쓰던 문자는 22개의 자음으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서양 문자체계의 모체가 되었다. BC 17세기 무렵 북(北)셈어족 문자를 기본으로 창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BC 11∼BC 10세기에는 초기 회화문자(繪畵文字)의 특성이 희박해지면서 실용적 문자가 비문 등에 널리 쓰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문자는 BC 11세기 무렵 페니키아 비블로스(지금의 레바논)에 있는 아히람왕의 관에 새겨진 각문(刻文)이다. BC 11세기 페니키아의 식민·무역 활동으로 페니키아문자는 지중해 연안지방으로 전파되었으며 그리스문자와 에트루리아문자를 통하여 라틴문자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페니키아인의 후예이며 올리브유의 무역상인인 탈레스는 소아시아연안의 밀레토스에서 활약한 고대 그리스의 최초의 자연철학자이다.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등에 여행하여 많은 과학적 지식을 익힌 텔레스는 기원전 585년 5월 28일의 일식을 예언하였다, 피라미드의 높이, 해안에서 해상의 배까지의 거리를 계산한 텔레스는. 이집트의 경험적·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최초의 기하학을 확립하였다. 탈레스는 신화적 요소를 철저히 버리고 세계의 기원을 순수하게 자연에 기초하여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모든 것이 물에서 나왔다고 주장한 탈레스는 그 이유로 깊은 내륙에서 발견된 바다동물의 화석을 들고 있다.

 

요나는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Tarshish)행 배에 승선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요나 1:3) 요나서에 나오는 ‘금속의 제련’이란 뜻의 다시스는 산스크리트어나 아리안어로는 '해변'(the sea coast)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직까지 다시스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만 성경 기록상의 추적을 통해, 스페인 남부 지브랄타에 가까운 타르테수스(Tartessus)로 추정해 볼 따름이다. 당시 다시스로 가는 배는 욥바 항에서 자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