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론다, 미하스 편 -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4>

高 山 芝 2019. 2. 24. 20:05

*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4>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론다, 미하스편 고 산 지

 

투우의 발상지로 알려진 론다(Ronda)는 인근에 위치한 쿠에바데라필레타(Cueva de la Pileta) 동굴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로 보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땅이다. 기원전 6세기에 켈트족들에 의해 생긴 아룬다(Arunda)라는 이름의 마을은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아시니포(Acinipo)로 바꾸어진다. 이 마을은 기원전 3세기, 고대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에 의해 요새화된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 도시 칭호를 받게 되었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을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 때문에 무기의 재료가 되는 주석 등 철광석을 운반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육로길을 개발한 로마는 산으로 둘러 쌓인 쉬어가는 마을인 론다를 개발했다, 론다라는 지명이 around에서 나왔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에스파냐의 옛 카스티야 지방의 민요가 ‘론다’로 불린다는 사실이다. 민요 ‘론다’는 젊은이가 연인의 집 창 밑에서 부르는 일종의 세레나데이다.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에 때로는 치리미아(chirimía)라는 민속악기와 오보에, 북이 등장하기도 한다 . 이 노래의 특징은 - 이 지방의 음악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 노래 끝에 “레히히오(rejijio)”라는 높은 웃음소리가 고음에서 저음까지 이어진다. 이 진귀한 웃음소리는 최초로 이곳에 마을을 세운 켈트족의 풍습이다. 이런 웃음소리는 북부 바스크 지방이나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1754년에서 1784년까지 30년에 걸처 건축된 론다의 플라사 데 토로스 투우장은,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다. 최초의 '코리다' 즉 투우 경기가 1785년, 이 곳에서 열렸다. 호세 마르틴 데 안데우엘라가 설계한 신고전주의 건물인 플라사 데 토로스 투우장은 5천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헤밍웨이가 "투우는 예술가가 죽음의 위험에 처하는 유일한 예술이다." 정의한 투우를, 에스파냐에 전한 것은 무어인(人)들이다, 17세기 말경까지는 궁정(宮廷)의 오락으로 귀족들 사이에 성행했으나, 18세기 초 부르봉 왕조(王朝) 시대에 이르러 투우라는 이름의 격식을 갖추게 됐다. 이 후 전설적인 투우사들로 인해 론다의 투우장은 큰 인기를 누렸다, 현재 흔하게 볼 수 있는 둥근 형태의 경기장도 여기서 채택되었다. 18세기 론다의 로메로 가문은 3대에 걸쳐 일류 투우사들을 배출한 유명한 투우사 가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페드로 로메로 마르티네스는 약 6천 마리의 황소를 죽였으며, 매번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유유히 경기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발레와도 같은 그의 투우 스타일은 여러 세대에 걸처 투우사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할아버지인 프란시스코 또한 한쪽 팔에 걸치곤 했던 '물레타'라는 붉은 천을, 스틱에 달아 흔드는 방식을 도입하여 '론다 파'라는 이름의 투우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투우는 오래전부터 엄격한 규칙에 따라 행해졌다. 투우사들은 주역을 마타도르(matador)라 하고, 그 밖에 작살을 꽂는 반데릴레로(banderillero)가 두 사람, 말을 타고 창으로 소를 찌르는 피카도르(picador)가 두 사람, 페네오(peneo)라는 조수 등 여러 사람이 한 팀이 되어 투우사를 소개하는 장내 행진으로 막이 오른다. 투우사는 모두 중세기풍의 금·은으로 장식된 화사한 복장을 걸치고 엄숙하고 화려한 연출과 함께 투우 특유의 분위기를 엮어낸다. 페네오가 투우장의 문을 열면, 투우사와 싸울 소가 선도역의 유도로 입장한다. 이 소는 되도록 영맹(獰猛)한 들소 중에서 골라, 투우장에 내보내기 전 24시간을 완전히 빛이 차단된 방에 가두어 둔다. 먼저 주역인 마타도르가 등장하여 카포테(capote)라는 빨간 천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소를 흥분시킨다. 소는 어두운 데 갇혀 있다가 갑자기 밝은 햇살 속에 나온 탓도 있고, 붉은 헝겊의 조롱을 받으면 미쳐서 날뛰듯이 장내를 휘젓는다. 이 때 말을 탄 피카도르가 등장하면 마타도르는 퇴장한다. 피카도르는 교묘하게 말을 부리면서 창으로 소를 찌른다. 흥분한 소는 자기 성질을 억제하지 못한다. 다음 반데릴레로가 등장하여 소의 돌진을 피하면서 6개의 작살을, 차례로 소의 목과 등에 꽂는다. 작살이 꽂힐 때마다 소는 미쳐서 날뛰며 장내의 흥분이 고조되면, 주역 마타도르가 검(劍)과 함께 물레타(muleta)라고 하는 막대기에 걸치듯이 감은 붉은 천을 들고 등장한다, 거의 미쳐 버린 소를 물레타로 유인하고는 교묘하게 몸을 비키면서 소를 다룬다. 이렇게 싸우기를 약 20분, 장내의 흥분이 최고도에 달하면, 마타도르는 정면에서 돌진해 오는 소를 목에서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죽임으로써 투우는 끝난다. 마지막 20분, 마타도르의 화사한 복장과 투우장의 중앙에서 자신은 그다지 움직이지 않으면서 좌우로 소를 물레타로 다룰 때의 몸동작은 마치 고전무용의 한 동작과도 같이 아름답게 보인다. 투우는 에스파냐 이외에 프랑스 남부·포르투갈·남아메리카·멕시코·페루 등에서도 오래전부터 행해 왔으나 나라에 따라 투우의 전개방식이 다소 다르다. 포르투갈과 같이 관객 앞에서 소를 죽이는 일을 금하고, 투우사의 안전을 위해 쇠뿔에 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씌우는 곳도 있는데, 이것은 마타도르가 소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장면을 동작만으로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론다는 헤밍웨이와 깊은 인연이 있다. 헤밍웨이는 론다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 소설에서도 론다가 등장한다. 전쟁에 희생된 병사들을 절벽 아래로 내던져지는 곳이 바로 론다의 누에보 다리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당시 스페인은 공화파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이에 반발하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내전으로 확대됐다.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분이다. 한 줌의 흙덩이가 바다에 씻겨 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모래톱이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나는 인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영국의 시인인 존 단(John Donne, 1572-1631)의 수필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은 헤밍웨이는, 스페인 공화파에 가담하여 앰뷸런스 운전기사로 참전했다. 그가 자원해서 의용군으로 참전한 스페인 내전은 표면적으로는 파시스트와 공화주의자 간의 전쟁터였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파시즘 등 온갖 이념의 전쟁터이였다, 자본가인 지주계급과 노동자인 농민계급이 서로에게 총을 겨눴고, 스페인 민중과 그들을 억압했던 가톨릭이 격돌한 종교 전쟁이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즘의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 진영인 프랑코를 도왔고, 소련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공화 진영을 지원했다. 한편에서 적군지역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적군에게 무기를 팔았다. 국제법을 들먹이며 중립을 취한 나라들은 내전중인 스페인을 이용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까 기회만를 노렸다. 패배한 공화 진영은 독일의 조직적인 군사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변명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공화진영 내부의 분열과 공화 정부의 무능력을 패배의 원인으로 꼽았다. 이런 전쟁터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헤밍웨이는 절감했다. 커지는 폭력에 대한 혐오와 함께 스스로 얼마나 더 싸워야 하는가를 고민했던 헤밍웨이는, 자아 고립과 더불어 경험과 신념의 일관된 질서가 깨짐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향한 모든 가치에 대해 재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헤밍웨이의 그런 갈등과 깨달음은 소설과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통해 은근하고 강렬하게 드러난다. 배경과 인물, 인물의 성향과 대사를 통해서 깨알같이 되살아난다.

 

론다는 옛날 아랍인이 살던 구시가지인 라시우다드와 투우장이 있는 신시가지인 엘 메르카디요로 나뉜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사이는 과다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50m 깊이의 타호 협곡이 가로막고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의 두 곳을 연결하는 11~16세기에 만들어진 비에호 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비에호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당시 왕인 필립 5세였다. 필립 5세는 직경 35m의 아치형 다리를 생각했다. 그러고는 야심 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8개월 뒤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다리는 무너져버렸다. 15년이 지난 1751년, 안달루시아의 건축가인 호세 마르틴는 아래쪽부터 단단히 돌을 쌓아 42년 후, 1793년에 지금의 누에보 다리를 완성했다. 타호 협곡(El Tajo Gorge)으로부터 돌을 가져와 축조한 길이 120m, 높이 98m로 마치 거대한 댐처럼 견고해 보이는 누에보 다리는 론다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이다. 건축사 호세 마르틴은 자신이 만든 다리, 누에보 다리에서 추락하여 생을 마감했다. 다리 중앙의 아치 모양 위에 위치한 방은,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누에보 다리는 1936년~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양 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현재는 다리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까마득한 깊이의 협곡 밑바닥까지 닿은 누에보 다리의 장엄한 풍광을 촬영하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론다를 찾아온다.

 

론다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도시이다. “전쟁이 끝난 뒤인지라 삶과 죽음, 다시 말하면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투우장뿐이었고, 나는 그것을 잘 살필 수 있는 스페인에 몹시 가고 싶었다”라고 토로한 헤밍웨이 뿐 아니라,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의 뾰족한 첨탑의 이미지는, 론다 협곡 ‘엘 타오’의 절벽을 여행 중 받은 영감으로 알려졌다. ‘헤밍웨이 산책로’를 따라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아슬람 역사의 흔적들도 만날 수가 있다. 적의 해골에 포도주를 따라 마셨다는 무어 왕의 별장 ‘카사 델 레이 모로’나 이슬람의 마지막 왕이 살았던 ‘몬드라곤 궁전’, 필립 5세의 문 등 그저 여는 동네 초입처럼 소박하기만 하다. 절벽 마을에 자리한 유적들이 이처럼 낮고 소박한 것은 자리하고 있는 곳이 이미 충분히 높기 때문이라고 혹자는 해석한다. 한동안 이곳에 살았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친구 조각가 로댕에게 보낸 편지에서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거운 열기에 마을은 더 하애진다”고 론다를 묘사했다. “나는 꿈의 도시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을 론다에서 찾았다.”는 릴케. “나는 아름다운 정원을 찾아 세상을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발견한 곳이 바로 론다의 하늘 정원이다.” 고 릴케가 절창한, 론다의 구시가지에는 헤밍웨이 카페가 있다. 카페의 노천 의자에 앉아 진한 커피 한 잔에 여행의 감흥을 음미해 보는 것 또한 이번 문학기행이 네게 준 행복이었다

"매일 밤 스페인 사람들의 절반이 굶주림 속에서 잠자리에 든다. 그들을 괴롭히는 병은 위장 질환이다. 그들의 병은 귀가 아니라 입을 통해서 치료되어야 한다. 농업이 어떤 방법으로 스페인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것인가?" 1900년의 스페인 국민들의 빈곤함에 대한 묘사이다. 이러한 빈곤은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가 집권한 194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1940년대 스페인의 경제 체제는 소비도 생산도 아무것도 없었다. 1940년대의 스페인은 '배고픔의 기간'이었다. 스페인의 국민 소득은 1936년에 비해 무려 1/5로 감소되었다. 당시 스페인의 물가는 소득 수준을 훨씬 앞질렀다. 육류나 구두는 노동자와 실업자들에게는 사치품이었다. 이처럼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에 전례 없는 경제적인 후퇴를 가져왔다. 따라서 '배고픔의 기간'인 1940년대 10년간, 프랑코 체제는 스페인 국민들이 충분하게 먹을 수 있는 빵을 생산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만 했다. 1957년, 정부는 내각을 새로운 기술 관료들로 구성했다. 새 내각은 스페인을 서구의 선진 자본주의, 특히 유럽 시장에 통합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신경제 정책을 내놓았다. 새로운 내각의 이러한 신경제 정책에 대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은행은 "만일 스페인이 번영을 원한다면 '시장에 대한 공포증'과 '자립 경제'라는 두려움을 버리고, 외국 투자와 대외 무역에 국가를 개방해야 한다."고 새 내각에 충고했다. 이러한 충고에 스페인 경제 전문가들은 서비스업 분야의 발전에 중점을 두면서 스페인 경제의 개방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서비스업 분야의 성장은 관광 산업의 붐을 불러왔다. 관광은 당시 가난하고 낙후된 스페인을 경제적으로 회복시키는 구세주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다르다."라고 선전했다. 스페인은 물가가 싼 국가이기 때문에 유럽 국가의 중산층들도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내고 태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에 몰려든 관광객들은 스페인 경제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사용했다. 1930년대 스페인에 오는 관광객들은 예술성이 풍부한 문화재들을 보러 왔었다. 하지만 1970년대는 지중해 연안의 해변이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태양 해안이라는 의미의 코스타 델 솔은 햇빛을 즐기기 위한 수많은 관광객들로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관광산업은 석탄이나 철강보다 훨씬 부가가치가 높았다. 관광 산업의 호황으로 스페인의 경제는고용이 증대되고 건설경기가 살아났다.

 

말라가에서 남서쪽으로 꼬불꼬불한 해안선을 따라 30~40분 정도 가다 보면 고급스러운 별장 같은 하얀 집들이 이어지다가 산기슭에 하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찬 미하스(Mijas)가 나온다.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치고는 규모가 작지 않다. 미하스는 안달루시아의 ‘하얀 마을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해 흔히 ‘안달루시아의 에센스’, ‘코스타 델 솔의 보석’이라 불린다.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산기슭에 자리 잡은 하얀 마을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는데, 흰색 벽과 갈색 또는 붉은색 기와지붕이 특징이다. 마하스의 명물은 “바위 성모 은둔지”로 불리는 동굴성당과 당나귀 택시이다. 이베리아 반도를 무어인이 지배할 당시, 숨겨 놓았던 성모 마리아 상이 16세기 이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하스 성관 주변을 산책하는 가톨릭 신자에게 종탑위의 비들기가 성모 마리아로 변해 현신한, 그 자리에 작은 성당을 건축했다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미하스는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에는 자동차가 올라올 수 없어서 당나귀가 주요 운송 수단이었다. 그런 당나귀가 지금은 관광상품으로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유럽 사람들이 은퇴 후 살고 싶은 곳 1위로 꼽았으며, 특별한 관광명소는 없지만 도시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항상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마을이다. 이태순 시인 자매와 우리 부부가 한 팀이 되어 마차를 타고 미하스의 골목을 돌면서 이국의 정취를 한 껏 뽐내 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