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5>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레콘키스타(Reconquista) 운동 - 고 산지
무어인들은 711년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1492년 물러날 때까지 약 800년 동안 스페인을 통치했다. 무어인이 반도를 지배하는 동안 스페인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와 가톨릭교도의 구별은 그리 명확치 않았다. 이는 이슬람문화를 수용한 가톨릭교도 때문이었다. 종교는 달랐지만 이슬람문화를 수용하며 이슬람교도와 함께 살았던 가톨릭교도를 '모사라베(Mozárabe)'라고 불렀다. 모사라베란 본래 '아랍화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랍 치하에 남아 있던 가톨릭교도‘를 의미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모리사베‘라고 불렀다. 이런 모사라베는 이슬람교도뿐만 아니라, 국토 회복을 위해서 투쟁했던 북부 가톨릭교도에게도 정치적으로는 항상 약자였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가톨릭교도는 물라디(muladí), 가톨릭이 회복한 지역에 남아 있던 이슬람교도는 무데하르(mudéjar), 그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슬람교도를 토르나디소(tornadizo)라 불렀다, 이는 경멸적인 말로 '변절자'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가톨릭과 이슬람교의 경계선상에 있던 에나시아도(enaciado)는 이슬람교도나 가톨릭교도들에 의해서 '스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두 가지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어서 스파이 행위를 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로 '정복'은 콘키스타(conquista)이다. 여기에 '다시 또는 재(再)'라는 의미가 있는 접두사 re-를 붙여 레콘키스타(Reconquista)란 단어가 생겨났다. '가톨릭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을 축출하는 운동 또는 전쟁'인 레콘키스타는 정복이 아닌 재정복의 전쟁으로서 1492년에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다. 모든 힘이 레콘키스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 국토 회복 운동은 가톨릭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에 대항해 싸운 전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난 뒤에 얻을 수 있는 반도 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가톨릭 왕국들 사이의 전쟁이기도 했다
무어인들이 처음 스페인 땅을 밟았을 때는 가톨릭 왕국의 분열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큰 어려움 없이 스페인 북쪽까지 밀고 올라갔던 그들이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산중에 남아 있던 가톨릭교도들 때문이었다. 북부지역만큼은 어떻게든 지키려 했던 가톨릭교도들은 남부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살아가는 무기력한 동포 - 물라디를 비난하면서 재기를 준비했다. 718년, 서고트 왕국의 귀족들이 아스투리아스의 펠라요에 최초의 가톨릭 왕국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다. 레콘키스타 운동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코바동가에서 이슬람교도들을 물리친데서 시작되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영토는 곧바로 갈리시아, 레온, 포르투갈 북부 및 카스티야 일부 지역에까지 확대되었다. 10세기에는 포르투갈 백작령이 탄생했다, 카스티야는 1037년에 독립 왕국이 되었다. 동부 지역 최초의 왕국은 팜플로나였으며, 아라곤 백작령은 1035년에 왕국으로 승격했다. 카탈루냐 지역에서도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생겨났다. 이렇게 11세기에는 가톨릭 세력들이 여러 개의 백작령, 또는 왕국들로 분리되어 이슬람교도들과 대치했다. 12세기부터는 이러한 여러 가톨릭 왕국들이 카스티야-레온, 아라곤 연합 왕국, 나바라, 포르투갈과 13세기에 들어 이슬람교도들의 그라나다 나스르 왕국 등 5개의 왕국으로 나누어져 각축을 벌렸다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이 통합하여 만들어진 왕국이다. 레온 왕국은 아스투리아스 왕국 출신의 알폰소 1세(재위 739~757)가 북부 칸타브리아 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남쪽에 위치한 레온을 정복함으로써 탄생했다. 알폰소 3세(재위 866~910)의 뒤를 이은 가르시아 1세(재위 910~914)는 수도를 레온으로 옮김으로써 드넓은 중부 고원 지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부터 이들을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 또는 레온 왕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카스티야는 본래는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의 한 백작령이었다. 페르난 곤살레스 백작(재위 927~970) 때부터 영토를 넓힌 그는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카스티야 왕국은 반도 중앙부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아라곤 백작령, 서쪽으로는 레온 왕국, 남으로는 알 안달루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카스티야 왕국은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세력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페르난도 1세(재위 1035~1065)는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을 통합하여 통합 왕국의 최초 군주가 되었다. 1085년. 알폰소 6세는 톨레도를 점령함으로써 국토 회복 운동의 주도권은 완전히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여세를 몰아 반도의 남부 지역을 차례로 점령해나가면서 사상 최대의 번영과 영광을 누렸다. 페르난도 3세의 아들이 스페인의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현왕 알폰소 10세이다.
팜플로나 왕국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나바라 왕국은 이미 10세기부터 국토 회복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에브로 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대했다. 11세기에 들어 나바라 왕국의 산초 3세 대왕(재위 1027~1035)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백작령 등을 점령하었다. 1034년에는 레온 왕국마저 굴복시킴으로써 가톨릭 세계의 '대왕'으로 군림하었다. 산초 3세 대왕 사후, 나바라 왕국은 장남 산초 가르시아 3세는 나바라 왕국을, 차남 페르난도 1세는 카스티야 왕국을, 서자 라미로 1세는 아라곤 왕국을 각각 물려받았다. 그러나 나바라 왕국은 산초 3세 대왕의 화려했던 영광을 유지하지 못하고 피레네 산맥의 소국으로 전락되었다.
아라곤 왕국은 영토는 작지만 피레네 산맥과 여러 강들을 끼고 있는 지형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 왕국은 원래 9세기 초 원주민 귀족인 나바라 왕국의 한 백작령이었다. 1035년에 산초 3세 대왕이 죽고, 그의 서자인 라미로 1세(재위 1035~1076)가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 이슬람 세력이 소왕국들로 분열되어 있는 틈을 타 본격적으로 국토 회복 운동에 뛰어들었다.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알폰소 1세(재위 1104~1134)가 사라고사 및 에브로 강 유역의 많은 도시들을 정복하여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알폰소 1세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었다.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제 라미로 수사뿐이었다. 1134년, 알폰소 1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알칸타라 등 세 기사단을 지명했으나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폰소 1세가 죽자 수사 라미로가 임시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갈수록 확대되어가는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맞서기 위해 형 알폰소 1세의 딸을 바르셀로나의 백작과 결혼시키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아라곤 - 카탈루냐 연합 왕국(1137)은 카스티야의 팽창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두 왕국이 갖고 있던 기존의 정치, 문화, 법률, 언어 체계 등은 그대로 존중된 연합체 성격의 통합이었다는 점이다.
1469년 10월 19일, 시칠리아의 왕이며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라 1세가 바야돌리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은 만난을 이겨낸 극적인 결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혼인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이라는 두 지배 가문이 결합하면 프랑스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의 대귀족들도 왕권이 크게 강화시키게 될 이 결혼에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사벨라(당시 18세) 1세는 그녀의 이복오빠이며 카스티야의 왕이었던 엔리케 4세의 추격을 받았으나, 톨레도 대주교가 보낸 군대에 의해 구출, 지지자들이 있는 바야돌리드로 이동했다. 그녀보다 한 살 어린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는 결혼식 며칠 전, 상인으로 변장한 몇 명의 측근들과 함께 아라곤 왕국의 수도 사라고사를 출발했다. 그는 주로 밤을 이용하여 신부보다 더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바야돌리드에 도착했다. 이들은 결혼식 비용을 차용(借用)하고 근친간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특면장(特免狀)을 받아내야만 했다.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가 결혼은 스페인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결혼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 있던 중세의 모든 가톨릭 왕국을 통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라 여왕은 정실이 아닌 능력 위주의 정책을 통해 관료 제도를 수립했으며, 로마법을 바탕으로 군주제, 국가의 주권, 사법권 및 중앙 집권 체제 등을 확립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법을 통해 신민들이 새롭게 충성을 바칠 대상은 영주가 아닌 국왕임을 인식시켰다. 귀족도 왕 밑에 종속시키고 군사 체제도 왕국에 통합시켰다. 이들 통합은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같은 권리를 갖고 있으며,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동등하다'는 생각 아래 두 왕국에 두 명의 군주를 각각 인정하는 통합이었다. 통합은 되었지만 여전히 공통적인 정치, 사법, 행정의 제도는 갖지 못했다. 유일하게 하나의 체제로서 권한을 행사한 기관은 종교 재판소뿐이었다.
레콘키스타 운동의 완성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의 결혼에서 시작이 되었다(1469년). 이들 두 사람은 반도 내 최후의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을 무너뜨리고, 1492년 1월 2일에 그라나다에 입성했다. 톨레도 대성당의 성가대석 의자 등받이에 이때의 전투를 기념하는 54개의 부조를 새겨놓았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뿌리를 뽑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만들었다. 이슬람 지배 8세기 동안은 모든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었지만 통일 스페인 왕국은 강경했다. 유태인 강제 개종과 추방령으로 유태인들이 스페인을 떠나게 되었다. 스페인은 신앙의 순수성은 지켰지만 많은 고급 두뇌들이 스페인을 떠나므로, 제국의 앞날을 흐리게 했다. 은행, 상인, 고리대금업, 의사라는 직업군의 대부분은 유태인들이었다. 스페인은 막대한 재화를 신대륙에서 끌어왔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거나 산업화 시킬 수 없었다. 추방된 유태인과 이슬람교도들을 받아들였던 아랍인들은 스페인을 비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부자로 만들기 위해 스페인은 가난을 택했다.”
가톨릭교도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종교적 통일이 성사되자, 이에 고무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를 '예루살렘의 왕'에 봉했다. 이는 성지 예루살렘을 속히 되찾아주기를 염원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을 '가톨릭 왕들'이라고 불리어젔다. 이는 두 왕이 유럽 내에서조차 초기 종교개혁의 물결에 밀려 세력이 약화되어가던 가톨릭교리를 가톨릭 개혁운동을 통해 방어해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 여왕은 명석하고 활발했지만, 종교적으로는 매우 배타적이었다. 그녀는 유대교나 이슬람교 같은 다른 문화나 종교를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통일된 반도에 강력한 중앙 집권화로 왕권을 강화하고, 종교 재판소를 통한 이교도들의 재침 기회를 차단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정치적·종교적 통합을 이룩하는 것만이 진정한 스페인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역사를 보면 평화와 공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공존할 때는 아름다운 복합 문화를 이루고 학문과 산업의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탄생한 스페인 제국은 배타적인 종교정책 때문에 화려한 대성당들은 건설할 수 있었지만, 전쟁과 학살과 문명의 후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르곤의 훼르난도 왕이 이끄는 가톨릭 연합군은 ‘성스러운 믿음(Holy Faith)’이라는 뜻의 산타페(Santa Fe) 요새를 구축하고, 그라나다성벽을 포위, 나자리 왕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성 안의 백성들은 외부와 격리된 채 서서히 굶어죽어갔다. 1492년 1월 2일, 보압딜(Boabdil-술탄-무하마드 12세)은 산타페 요새로 나와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라나다의 백성들이 이슬람교를 계속 믿도록 보호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며 궁전의 열쇠과 금화를 건낸 그는, 모로코로 떠나기 전 그라나다의 ‘한탄의 언덕’ 에서 궁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은 드오당크(Dehodencq)의 명화로도 널리 알려저 있다. 이때 보압딜의 어머니는 “사나이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여자처럼 눈물을 흘리는구나. 울음을 멈춰라” 고 꾸짖었다. 보압딜은 스페인 내에 사유지를 주겠다는 이사벨라 여왕의 제의를 거절하고, 모로코의 페즈로 망명을 택했다. 이후 질투와 부러움의 대상이던 알-안달루스의 술탄은 모로코의 술탄에게 편지로 선처를 부탁했으나. 끝내 모로코정부는 이들을 외면했다. 수백 년 후 1618년, 역사가 알-마카리가 페즈에서 술탄, 보압딜의 후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왕족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극빈층으로 자카트 - 이슬람교도들의 자선기부 - 에 의지,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