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 편 -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7>

高 山 芝 2019. 2. 24. 20:13

 *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7>

                     -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 편 - 고 산지

 

결혼을 통해 스페인을 통일한 카스티야 공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공국의 페르난도 왕을 ‘가톨릭 공동왕’이라고 부른다. 이들 카톨릭 공동왕은 가문간의 결혼을 통하여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유럽에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먼저 영국과의 동맹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아라곤의 카탈리나 공주와 영국의 아서 왕자의 혼인(스츄어드 왕조)을 성사시켰다. 1497년에는 가톨릭 왕들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후안 왕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막시밀리안 1세의 딸 마르가레테와 결혼했고, 가톨릭 왕들의 둘째 딸 후아나는 펠리페 대공(신성 로마 제국 황제-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과 결혼했다. 그러나 후안 왕자는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죽었다. 그의 아내 마르가레테는, 임신은 했으나 사산했기 때문에 가톨릭 왕들을 직접 계승할 자손을 얻지 못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왕위 계승 순위는 포르투갈의 마누엘과 재혼했던 가톨릭 공동왕의 큰딸 이사벨라가 낳은 아들 미켈의 차례였다. 그러나 1498년 이사벨라과, 그녀의 아들 미겔이 1500년에 죽음으로 스페인의 왕위 계승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가톨릭 공동왕의 후손 중 성년으로 살아남은 후손은 후아나가 유일했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는 페르난도 왕과 후아나 그리고 펠리페 1세(필리페 대공) 3명에게 승계되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펠리페 1세가 병으로 사망한 후 단독으로 스페인을 다스리게 된 페르난도 왕은, 딸 후아나 대신 외손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1세를 계승자로 정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1516년 사망하였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카를로스 1세가 1516년 3월 14일, 왕위를 계승함으로시작되었다. 2년 뒤인 1518년 6월 28일, 카를로스 1세는 유럽을 대표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카를로스 5세)에 즉위했다. 친가와 외가의 엄청난 영토를 상속받은 카를로스 1세의 스페인은 유럽의 변방국가에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변모했다. 가톨릭을 수호할 책임를 갖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수호를 위한 십자군을 조직했다.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루터파가 카톨릭 십자군의 주적이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장하자 카를로스 1세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루터를 소환했다. 제국의회는 루터에게 자기비판을 강요했으나 그는 신앙의 근거가 교회나 공의회가 아니라 성경이라고 공언함으로써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다. 1526년, 오스만 튀르크가 유럽을 침공하자 슈파이어 국회에서 일시적으로 루터파를 인정했던 카를로스 1세는 1529년 다시 루터파를 금지하였다. 이때부터 개신교도들은 ‘항의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프로테스탄트’로 불리어젔다. 1555년 2월 5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개회를 선언한 카를로스 1세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모든 문제를 조정할 권한을 넘겨주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이 타결된 이듬해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신성로마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준 후 퇴위하였다.

 

펠리페 2세 역시 가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펠리페 2세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종교정책을 고수했다. 특히 ‘종교가 우선이다’로 요약되는 펠리페 2세의 대내외 정책은 정치적 혼란과 재정의 혼란을 불러왔다. 네 차례의 국가파산의 원인은 대부분 영국, 네덜란드, 오스만 튀르크와의 종교 전쟁 때문이었다. 펠리페 2세는 영국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영국의 메리 1세와 결혼했다. 메리 여왕은 영국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후계자를 갖지 못한 채 1558년 세상을 떠났다. 메리 1세의 사망으로 영국의 왕위는 메리 1세의 이복 자매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계승되었다.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매파를 보냈다. 펠리페 2세의 청혼에 숨겨진 의도를 잘 읽고 있던 엘리자베스 1세는, 형부였던 펠리페 2세의 청혼을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라는 말로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청혼에 실패한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를 왕위에 앉히려는 공작을 펼쳤다. 그러자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1587년, 메리 스튜어트를 참수형에 처했다. 가톨릭교도였던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목을 잘라버린 이 엄청난 사건으로 신교와 가톨릭의 갈등은 더욱 더 심화되었다. 레판토 해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퇴위를 목적으로 1588년 무적함대를 보냈지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로도 두 번 더 영국에 무적함대를 보냈지만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신풍(神風)'이란 큰 폭풍우로 전체 함대 중 절반을 잃고 참전 병사들 중 1/4만이 스페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무적함대의 패배 소식을 들은 펠리페 2세는 "적과 싸우라고 함선을 보냈지, 누가 자연과 싸우라고 했나!" 라고 안타까워했다. 세르반테스는 펠리페 2세의 이 유명한 표현을 듣고 "우리들의 함대가 퇴각한 것은 적의 능란함 때문이 아니라, 저 감당할 수 없는 폭풍과 바다와 하늘 때문이노라."라고 왕의 절규를 정당화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후반부터 1650년까지 대서양에서 해양 활동을 주도했다. 당시 유럽은 종교적 대의가 모든 것에 우선되는 시대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좋다. 그렇지만 교역은 더 좋다."라는 속담을 만들어내면서 무역을 통한 실리를 추구했던 네넬란드의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의 억압 통치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성장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종교였다. 특히 네덜란드 북부 지역에서는 칼뱅 파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점차 강력해지자, 카를로스 5세는 종교 재판을 실시, 이들에 대한 박해를 강화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카를로스 5세의 퇴위 후에 더욱 더 커져갔다. 카를로스 5세에 이은 펠리페 2세는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은으로 왕실의 재정이 튼튼해지자,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광적인 탄압 정책을 펼쳤다. 1566년, 약 500명의 네덜란드인들이 섭정 파르마의 마르가레테에게 악정(惡政)을 중지할 것과 종교 재판을 개선해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하자, 프로테스탄트들은 성모 마리아 상과 십자가 상을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우상 파괴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성상 파괴 운동(Iconoclastic Fury)'이라고 명명된 이 운동의 선봉대는 칼뱅교 목사들이었다. 가톨릭의 종교적 상징물인 성상은 훌륭한 문화재이기도 했지만, 칼뱅교 목사들은 자신의 청빈을 무기로 가톨릭의 성상을 부패와 미신, 허영의 상징으로 몰아세웠다. 1566년 혹독한 추위와 식량난이 더해지자 빈민층의 분노가 가톨릭의 화려한 성상들을 향해 분출되었다.'성상 파괴 운동'은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탄트들의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의 억압 정치에 대한 불만의 표출을 의미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의 저항에 놀란 펠리페 2세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군대와 대결했던 정예 병사들을 네덜란드 지역에 투입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원정을 십자군과 레콘키스타 운동의 연장으로 생각했다. 네덜란드에 도착한 스페인의 진압군들은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했다. 피의 법정이라고 일컫는 특별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이 '피의 법정'에서는 무려 1,100명이 사형에 처해졌고, 궐석 재판을 통해 9,00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펠리페 3세는 정치에 무관심했다. 스페인과 갈등관계에 있던 주요 국가들과 평화협정을 맺어 외부와의 충돌을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고자 했다. 1604년, 펠리페 3세는 영국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1609년, 독립전쟁을 선언한 네덜란드와는 스페인 국고의 반 이상을 탕진한 후에야 평화조약을 체결, 펠리페 3세가 퇴위하는 1621년까지 12년간 평화가 지속됐다. 그러나 펠리페 3세의 평화정책은 유럽 전체가 참전한 마지막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1618년 ~ 1648년)으로 깨지고 말았다. 30년 전쟁에서 스페인은 남아 있는 마지막 부를 쏟아부었으나 전쟁의 주도권을 잃기 시작하면서 결정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통화정책은 실패로 인한 재정위기가 닥치면서 악순환은 반복되었고, 종교정책도 실패하였다.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이슬람교도였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 약 30만 명을 추방하였는데 이는 ‘상그레 림피에사’(종교적 순혈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종교 동화정책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30년 전쟁은 펠리페 4세 시기에 프랑스가 개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펠리페 4세는 평화정책을 지향했던 펠리페 3세 시대 대신 호전적인 펠리페 2세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는 ‘30년 전쟁’을 이어갔고, 네덜란드와의 휴전 연장없이 전쟁을 재개했다. 스페인의 대외 팽창정책의 재개는 결과적으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안겨주었다. 선왕 시절에 시작된 네덜란드와의 휴전이 종료되었다. 펠리페 4세는 네덜란드와 다시 협상을 벌였으나 네덜란드가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자, 협상을 결렬시키고 전쟁을 재개했다. 전쟁 초기 펠리페 4세는 브레다 등의 요충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1635년 프랑스가 30년 전쟁에 참전하면서 네덜란드와의 전쟁도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에서 1631년, 개신교 군대인 스웨덴 군대가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대해 가톨릭 동맹은 뇌르틀링겐에서 1634년 스웨덴 군대를 패퇴시키면서 승리의 추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맹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러자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동맹이 우세해지자 유럽의 주도권을 프랑스가 장악하기 위해서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1639년의 두나스 패배, 1642년 로크루 패배, 1647년 랑스 패배로 30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패배는 명확해졌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성사되어 스위스가 독립하고 칼뱅파 등 종교적 관용이 가능해졌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네덜란드를 잃었으며, 유럽의 세속통치권을 행사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은 300개가 넘는 작은 주권국 연합체로 전락했다. 또한 마지막 대규모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에서 실질적인 승전국이 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4세는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한 스페인 버전의 십자군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펠리페 4세의 뒤를 잇는 카를로스 2세의 스페인 영토를 천천히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카를로스 2세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다.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그는 왕위를 물려줄 후세가 없었기 때문에 향후 스페인의 왕위계승은 유럽 왕실들의 초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카를로스 2세가 맞이했던 두 왕비와 그가 치른 두 차례의 퇴마술조차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스페인 왕위계승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의 치세 기간 내내 여느 때보다 치열했던 궁중 음모와 암투 역시 현재의 권력보다는 카를로스 2세 사후인 미래의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카를로스 2세 시기에 스페인의 구조적인 위기가 정점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 스페인은 경제적으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폭넓은 지방자치의 허용으로 당대에 카탈루냐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장 훌륭한 왕’으로 꼽혔던 것을 보면 카를로스 2세가 통치능력이 없었다는 기존의 통념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카를로스 2세 시기의 수많은 총신 중 탁월했던 이는 오로페사 공작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 연대를 통해 스페인을 외부세력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오로페사 백작의 개혁 시도는 스페인 밖의 거대한 두 가문의 막후 조종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필리프의 대결은 필리프 파의 승리로 끝났다. 카를로스 2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두 가지 선택지에서 국익 측면에서 차악인 필리프를 고르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끝나고 부르봉 왕가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3세의 첫째 딸이자 펠리페 4세의 누나였던 안 도트리슈부르봉 가문의 루이 13세와 결혼해서 루이 14세를 낳았다, 루이 14세의 부인인 마리아 테레사 역시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딸이었다. 마리아 테레사는 스페인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의 이복누이였으며, 향후 스페인 왕위를 잇는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는 마리아 테레사의 손자였기 때문에 스페인의 왕위계승 주장이 가능했다. 결국 카를로스 2세가 두 번의 유언장 취소 후 마지막으로 선택한 계승자는 부르봉 가문의 필리프(펠리페 5세)였다. 그러나 주변국들은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문을 연 펠리페 5세(재위 1700년 ~ 1724년, 1724년 ~ 1746년)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 루이 14세의 손자이다. 후손이 없이 사망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를 계승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왕위계승 조건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을 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스페인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별도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이 연합하여 스페인-프랑스 동맹과 전쟁을 벌인 전쟁에서 펠리페 5세는 위트레흐트 조약(1713년)으로 왕위계승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펠리페 5세의 왕위를 인정받는 대신, 스페인은 요충지들을 양도해야 했으며, 이 조약으로 영국으로 넘겨야 했던 지브롤터는 아직도 양국간 영토 분쟁지가 되고 있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에도 중앙집권 성격이 강한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중앙정부에 계속 저항한 스페인 내부의 카탈루냐-아라곤 공국은 1716년 신계획령을 통해 자치권이 폐지되었고, 법과 행정이 카스티야에 종속되었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이후 페르난도 6세,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로 이어졌다. 카를로스 3세는 대표적인 계몽군주로서 오늘날 마드리드의 뼈대를 세우는 역할을 했다. 카를로스 4세 재위기에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침입을 받았다. 이후 페르난도 7세, 이사벨 2세를 거치며 부르봉 왕가는 자유주의자와 반목 및 연합하게 되었으며, 안정적인 시기를 보낸 알폰소 12세 때에는 양당제가 채택되고 경제적으로도 활성화되었다. 알폰소 13세는 국정의 혼란 와중에 프리모 데 리베라의 쿠데타를 인정하고, 그를 총리로 임명하지만 결국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2차 공화국 이후 곧 스페인은 내전에 휩싸이고 승리자인 프랑코 장군이 독재정치를 폈다.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으로 후계 권력을 잡았지만 1978년 신헌법을 통해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극적으로 이루어내고, 스페인의 정체로 ‘의회군주제’를 채택했다. 현재는 펠리페 6세가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왕으로 재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