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9>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톨레도편 - 고 산지
역사가 리비우스는 ‘성벽으로 둘러쌓인 요새’ 라는 의미의 '톨레툼(Toletum)‘ 을 기원전 193년 켈트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로마가 건설한 식민도시라고 기록하였다. 톨레도의 어원은 톨레툼에서 비롯되었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톨레도는 아랑후에스부터 서남 50킬로미터, 삼면이 타호 강에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을 몰아낸 비시고도 왕조(서고트족)의 수도였던 톨레도는, 711년 아랍왕 타릭에 점령되어 약 400년 동안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다. 10세기에는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북부 전진 기지가 되었으나, 이슬람 세력의 분열에 따라 1010년 이슬람 소왕국 톨레도 타이파(Taifa)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1085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탈환하여 카스티야 레온 연합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톨레도는 카톨릭 왕국의 전초기지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문화·정치의 중심지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곳에 거주한 세파르디 유대인은 11~12세기부터 공동체를 이루어 금융, 공업, 상권을 소유하여 경제적인 부를 차지했지만, 1492년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대한 레콘키스타가 완결되자 이교도로 낙인 찍혀 추방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톨레도의 거의 모든 공업과 상권을 쥐고 있던 유대인의 추방은 곧바로 톨레도 경제의 쇠퇴로 이어젔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1561년 펠리프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 옮기면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마저 상실하였으나, 종교적 위상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5세기 이후로 수많은 종교회의가 개최되었고, 13세기 초부터 15세기 말에 걸처 걸설된 톨레도 대성당은 지금도 스페인의 수석성당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톨레도는, 오랫동안 3대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존해 온 특수한 환경에서 이질적인 문명들이 접촉하면서 탄생한 무데하르 양식으로 역설적인 혼합주의를 모두 표현하면서 놀라운 걸작들을 남긴 도시이다. 무데하르 예술은 이슬람과 기독교, 유대교 문화가 지식과 경험을 주고받으며 평화롭게 공존해 온 인류의 소중한문화 유산이다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고딕 양식 성당 중 하나인 톨레도 대성당은 중요한 예술적 보물들로 유명하다. 샤르트르 대성당 같은 유럽 북부의 거대한 고딕 성당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양식이 하나로 혼합된 아름다운 성당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 마르틴이라는 건축가가 처음 짓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기초 작업을 담당했던 페트루스 페트리는 1291년 사망했다. 건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세워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지금도 서고트 족의 예식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는 '모사라베 예배당'(1504)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회랑은 무데하르 양식, 즉 기독교 통치기까지 살아남은 무어 양식의 특징을 몇 가지 갖추고 있다. 고딕 양식 요소는 세 개의 중앙 현관 위편에 새겨진 복잡한 조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아마 톨레도 대성당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 뛰어난 예술품 덕택일 것이다. 하나는 '트란스파렌테'(1721~1732)라는 이름을 가진 나르시소 토메의 작품으로, 대리석과 설화 석고로 제작한 놀라우리만치 화려한 제단 장식이다. 그는 윗편의 둥근 천정을 깎아 구멍을 만들어 자신이 조각한 인물상들이 태양 광선을 받아 영적인 빛으로 이루어진 후광 안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벽면 전체를 제단처럼 화려하게 장식하는 양식은 스페인의 바로크를 대표하는 추리게라 삼형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식이다. 풍부하고 화려한 장식성, 정밀한 세공기술이 어우러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수많은 장식요소들로 인해 우리는 무질서와 혼돈을 경험하게 한다.
또 하나의 작품은 그리스 출신의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EL GRECO)가 그린 엘 에스폴리오(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이다. 비잔틴 화풍 및 베네치아 화파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던 엘 그레코는, 악몽에나 나올법한 기괴한 색채 감각때문에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많은 근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더니즘의 초석이 된 작품들 중 하나인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은 <성 요한의 계시>(1608~1614경)로도 알려진 엘 그레코의 비범한 작품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에서 큰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던 엘 그레코의 재능은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 재평가 받았다. "엘 엑스폴리오"는 1577년 여름에 그리기 시작하여 1579년 봄에 완성된 작품이다. 톨레도 대성당의 성물실 제단에 걸려있는 이 그림은 엘 그레코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그림에서 예수는 고요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 표정만으로도 신성이 드러나는 모양이다. 평온한 예수와는 달리, 그를 체포하는 군사들의 모습은 더 없이 포악한 모습이다. 뒷배경에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이 예수를 힐난하듯 손가락질하고 있고, 두 명의 남자는 누가 그의 옷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 예수 왼쪽의 녹색옷을 입은 남성은 예수의 손을 묶은 줄을 단단히 쥐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 그의 옷을 벗길 준비를 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노란 옷의 남자는 십자가에 못이 박힐 구멍을 뚫고 있다. 예수의 밝게 빛나는 얼굴은 사형 집행인들의 거친 얼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붉은 옷을 입고 있다. 왼쪽 전경에는, 세명의 마리아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다음 장면이다. 초록색 옷을 입은 야만적 표정을 지닌 병졸이 밧줄로 주님을 포박지은 후 옷을 벗기려 하고 있고, 그 밑에 노란옷의 병졸을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 때 수고를 줄이기 위해 발부분의 못구멍을 뚫고 있다. 빨강, 노랑 파랑색이 어우러진 극도의 긴장감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 편에서 보면 극도의 실망과 긴장과 불안의 순간이다. 이 순간에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준비를 하고 있는 노란 옷의 사나이를 왼손으로 축복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한 방울의 마지막 피까지 다 바치신 주님의 또 다른 상징이다.
1588년, 엘 그레코는 그의 또 다른 역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완성시켰다. 산토 토메 성당의 수호성인 오르가즈 백작(곤살로 루이스 데 톨레도)의 죽음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오르가스 백작이 죽자, 그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기 위해 두 명의 성인이 나타났다. 그림은 위쪽의 천국과 아래쪽 지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젔다. 갑옷을 입힌 창백한 시신이 땅 속으로 내려지는 동안에, 그의 영혼은 천국에 있는 예수의 무릎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겨자 빛이 나는 노란색, 선홍색, 어두운 파란색이 내는 튀는 색조들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배경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백작의 영혼이 육체를 떠났음을 색깔로 나타낸 것이다.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은 고요하고 사색적이다. 백작의 등을 잡고 있는 성 어거스틴과 다리를 붙잡고 있는 스테판의 표정이 이채롭다, 그림에는 엘 그레꼬와 그의 아들도 등장한다. 어린이가 엘 그레꼬의 아들 호르헤 미누엘이다. 가운데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이 엘 그레꼬이다. 구름사이로 금발의 천사가 백작의 영혼을 감싸서 영의 세계로 올려주고 있다. 엘 그레꼬는 보이지 않는 영혼을, 갓 태어난 아이를 연상케하는 비유를 들어 표현했다. 오르가스 백작은 끼스띠야 왕국의 공증인으로 똘레또 지방의 귀족이었다. 1323년에 사망한 그는 일생동안 성당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한 신실하고 동정심이 많은 신자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산토 토메교회의 가난한 성도들과 승려단의 빚을 갚도록 하라는 유언장을 남겠다. 오르가스 백작 도움으로 산토 토메교회는 재정적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고, 장례식에 얽힌 이야기를 그의 무덤위에 그렸다.
교회에 재산을 헌납하기로 한 오르가스 백작의 유언장이 사라진 후 240년이 흘렀다. 어느 날 백작의 유언장을 발견한 추기경의 제소를 받은 교황청은, 백작의 후손에게 모든 재산의 헌납을 명령하고, 백작의 선행을 기념하여 엘 그레꼬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다. 백작의 후손은 신부를 매수하여 매달 얼마 씩 뇌물을 주기로 하고 유언장을 숨겠으나, 매달 나오기로 한 돈이 나오지 않자 백작의 유언장을 추기경에게 보고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의 가치를 둘러 싼 엘 그레코와 산토 토메 성당이 벌린 소송은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착수금 명목으로 46,000 마라베디(옛 스페인의 화폐)를 받고 그림을 완성한 엘 그레코와 성당 측은 그림의 가치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고 양측은 감정가 대로 그림의 가치를 450,000 마라베디에 합의했다. 그러나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 성당 측은 그림의 가치가 과도하다고 생각하고, 그림의 가치를 낮추기 위해 또 다른 감정사 두명에게 감정을 의뢰 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600,000 마라베디라는 1차 감정가격보다 훨씬 높은 감정 가격이 나왔다. 성당측이 이를 무시하고 1차 감정가격으로 지불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엘 그레코가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당시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엘 그레코는 채권단은 소송이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엘 그레코에 압력을 넣어 1차 감정가격을 수락했다는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이다
알카사르(Alcázar, 성채)는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인 세르반테스 언덕에 서 있는 인상적인 건물이다. 처음에는 로마인들이 관청으로 사용되었다. 알폰소 6세 통치 기간에 기독교인들에 의해 재건축을 시작한 알카사르 성채의 첫 주인은 중세 스페인의 영웅인 엘 시드 장군이다. 13세기 현왕(賢王) 알폰소 10세는 정사각형 바닥 평면과 그 귀퉁이에 흉벽(胸壁) 탑을 설치하였다. 파사드(facade, 건물의 한쪽 면, 대개 문이 있음)는 만들어진 시기와 양식에 따라 서로 다르다. 서쪽 파사드는 르네상스 양식이고 동쪽은 중세식, 북쪽은 플라테레스크(Plateresque) 양식, 후안 데 에레라(Juan de Herrera)가 만든 남쪽은 추리게라(Churrigueresque) 양식이다. 또한 알카사르에는 코린트식(Corinthian) 주두(柱頭)를 가진 2층으로 된 파티오(patio, 건물 사이의 안뜰)도 있다. 알카사르는 1170년, 1867년, 1882년에 큰 화재를 겪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을 때 사관학교가 이곳을 사용하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 완벽하게 복구되어 현재는 군대 사무실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알 칸타라 다리는, 아랍어인 교량이라는 의미 때문에 무어인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로마시대의 건축물이다. 이 다리는 톨레도의 가톨릭 저항군과 아랍군 사이에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다리 자체는 그대로 유지 되었다. 특히 아랍왕조의 압달라만 3세는 손상된 교량의 보수를 명령하여 오늘날까지 다리가 보존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했다. 1257년 대홍수로 교량이 심하게 훼손되자 현왕 알폰소 10세는 교각에 거대한 보호장치를 설치하였다. 알 칸타라 다리에는 마주보는 두 개의 탑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972년 마차 등이 쉽게 통행할 수 있도록 헐리고 그 자리에 아치문이 건설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단 하나의 탑 은 1484년 고메스 만리케라는 건축가가 재건한 것으로 카톨릭 국왕부처의 문장이 새겨져있다
서 고트 왕국의 수도였기던 톨레토는 종교회의가 많이 개최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악은 신앙에서 뺄 수 없는 요소이다. 7세기의 성직자인 성 에우헤니오, 성 일데폰소, 성 프리앙, 이 세 사람은 음악 지식이 뛰어나 예배를 위한 성가와 찬미가를 작곡했다. 문헌에 남은 옛 스페인 음악은 〈모사베라 성가〉로 되어 있는데, 〈모사베라〉는 ‘아랍으로 위장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것은 서 고트 왕국 시대에 형성된 기독교 성가인데, 이슬람 시대에도 많은 기독교도(모사베라)에 의해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1076년 로마 교회의 압력으로 금지되었지만 톨레도에서는 특별 허가를 받아 12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펠리페 2세가 1561년에 마드리드로 천도하기까지 톨레도는 스페인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문화도 찬란했다. 그중에서 톨레도에서 태어나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왕이 된 알폰소 10세(재위 1252~1280)는 그의 궁전에 안달루시아의 모로인 악사와 프랑스 시인 등을 70명 이상 모아 성모 마리아를 칭송하는 400곡 이상이 수록된 〈성모 마리아 송가집〉을 편찬하여 스페인 음악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겠다. 이 곡들은 단선율이지만 우아한 멜로디는 경건한 분위기로 듣는 사람들을 중세로 끌어들인다. 이 송가집은 갈리시아어에 의한 시 형식으로 씌어졌다. 중세 스페인은 시를 읊을 때 일반적으로 갈리시아어를 사용했다. 스페인 가톨릭에서 특히 성모 마리아를 많이 찬양한 것은, 이슬람 시대에서 해방된 무지하고 가난한 민중들에게 기독교를 포교하는 데에는 어려운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것보다 ‘어머니의 사랑 같은 방법으로’라는 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