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10>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고야의 고향 사라고사 편 - 고 산지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자치지방의 수도이자 사라고사주(州)의 주도(州都)인 사라고사는. 바르셀로나 서쪽으로 약 296km, 마드리드에서는 325km 지점의 내륙에 있으며, 에브로강 유역의 아라곤 지방 중앙에 위치한다. 원래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정착하고 살았던 선주민인 세데타니(Sedetani)족이 터전이었다. 칸타브리아 전쟁(기원전29-19)이 일어나면서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 북부를 점령하였고 로마군의 군사기지로 발전하였다.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도시로 번성하게 되었다. 그 후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세력인 무어족의 지배를 받았다가 16세기 레콩키스타 운동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군소 왕국들이 단일 국가로 통일될 때까지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그리고 1808~1809년 반도전쟁에서 나폴레옹 침략에 저항한 사라고사의 끈질긴 항전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그리스도교의 기적 스토리와 더불어 이슬람문명과 혼재된 문화 양식은 이 지역에 관광 산업을 불러일으켰다.
사라고사의 에브로(Ebro) 강가에 있는 필라르 성모성당은 화려하게 타일을 붙인 11개의 둥근지붕으로 유명하다. 필라르(Pilar)는 스페인어로 기둥이란 뜻인데, 예수님 승천 후 40년경(40년 1월 2일 밤) 신앙을 전파하러 온 사도 야고보(산티아고)와 제자들에게 성모님께서 대리석 기둥 위에 나타나셔서 그 곳에 제단이 있는 성당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신이며, '산티아고 순례길'의 주인공이다. 이 성당의 천장에는 이 도시 출신의 세계적인 낭만파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F.Goya, 1746~1828)의 '레지나 마르티움(Regina Martyrum, 순교자들의 여왕)'이라는 천장화가 있다. 또한 필라르 성모 대성당은 화려하게 타일을 붙인 11개의 둥근지붕으로 유명하다. 이 성당은 그리스도교의 기적 스토리와 더불어 이슬람문명과 혼재된 문화 양식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3개의 대형 폭탄이 필라르 성모 대성당에 떨어졌으나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중 2개의 폭탄은 필라르 성모 대성당 안에 전시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라고 믿고 있다.
이슬람의 예술적 전통은 아라곤 카톨릭 왕국 내에서 변화·발전하여 무데하르 건축 양식을 탄생시켰다. 무데하르(Mudejar)는 아랍어의 무닷잔(mudajjan, ‘잔류자’)이 스페인어로 와전된 말로 그리스도교도에게 재정복된 후의 이베리아반도에서 자신들의 신앙·법관습을 유지하면서 그 땅에 피지배자로서 잔류를 허가받은 이슬람교도를 말한다.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한 1085년의 톨레도함락 이후 재정복(Reconquista)이 진행됨에 따라 무데하르의 수는 점차 증가했다. 동시에 그들은 스페인사회에 동화되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뛰어난 문화·학문·기술을 중세스페인, 나아가서는 유럽제국에 전달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코르도바, 세비야, 톨레도, 발렌시아 등의 대도시에 거주하고, 건축업, 가죽세공, 금속세공, 조각업, 직물업, 문필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에 의해 이슬람문화와 중세스페인 그리스도교문화와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이 융합문화를 무데하르문화라고 하며, 그것을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세비야의 알카사르(Alcázar)가 있다.
'재정복' 이후에도 무어족 무슬림의 일부가 이베리아반도에 잔류했다. 그들은 인두세를 납부하는 대신 그들 고유의 종교, 언어, 관습을 보전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대도시에는 점차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이슬람적 공동체인 무데하르 거주지가 있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무데하르들은 아랍-이슬람문화와 기독교 스페인의 문화를 결합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리하여 무데하르는 흔히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융합해 출현시킨 양식 혹은 고딕양식과 무어양식의 결합이 낳은 문화를 일컫기도 한다. 무데하르양식은 건축과 예술에서 눈길을 끄는데, 가구의 경우 대개 유럽적 형태와 아랍적 장식이 결합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바르구에(vargue)로 불리는 캐비닛–앞부분이 높은 문갑류–은 섬세하게 가공한 쇠를 덧붙이고 벨벳으로 장식했다. 그 캐비닛에는 또한 조각, 채색, 도금, 상아상감 등 무어적 양식이 첨가되었다. 무데하르양식은 그 밖에 금은 세공품, 도자기, 옷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건축의 경우에도 무데하르양식은 드물지 않다. 스페인에서는 주로 수도원 건축에서 현저했던 중세적 전통 및 17세기까지 영향을 끼친 후기 고딕양식의 리브(둥근 지붕의 서까래)도 채택되었지만, 기하학적 형태의 목재천장, 채색타일, 직각형태의 아치(알피즈, alfiz) 및 세 꽃잎 무늬(trefoil) 아치 같은 무데하르양식도 널리 채택되었다. 톨레도, 코르도바, 세비아, 발렌시아 등지에는 물론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 건설한 산토 도밍고, 멕시코시티, 퀴토, 리마, 쿠스코 등지에도 무데하르양식의 건물들이 남아있다.
최후의 위대한 만능화가 고야는 자연을 자신이 보고자 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모방하려는, 17세기 네덜란드 화파에서 시작되어 18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한 자연주의 예술 이념을 그의 초상화에서 완벽하게 구현했다. 19세기 최대의 예술적 성과로 평가하는 '인상주의'도 이미 1808년의 마드리드 대학살을 묘사한 그의 작품에 훌륭하게 표현되었다. 나폴레옹의 승리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전체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에스파냐의 젊은이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다 프랑스 병사들에게 총살당하는 장면을 고발한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을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고야 자신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잠들고 손에 팔레트를 쥔 채로 세상을 떠난 구식 예술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든두 살까지 살았으나 대부분의 생애를 어려움 속에서 보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았고, 에스파냐 궁정화가라는 근사한 직함을 얻었고, 음식을 얻기 위해 전당포에 옷을 잡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기질적으로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 베토벤을 닮은 탓에 현세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지금과 매우 비슷했다. 찬란한 출발의 시대였다. 계몽의 여명이 먼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애에 바탕을 둔 시대, 자유와 완전한 기회의 평등이 모든 사람의 천부적 권리가 되는 시대가 막을 열고 있었다. "가자, 조국의 아이들아!"1) 그런데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행렬은 자유의 여신상으로 향하지 않고 도중에 어딘가에서 방향이 바뀌었다. 알고 보니 어느새 단두대의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영광의 날이 왔도다!" 그러니 시민 여러분, 한 걸음만 내딛어주신다면 우리가 신속하고도 능숙하게 여러분의 목을 치고 몸뚱이를 생석회 구덩이에 묻어드리리다! 이 모든 일은 고결하고 참된 친구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시민께서 자신의 설계도에 따라 현세에 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오. 그의 뒷주머니에 설계도와 종이 몇 장이 삐죽 나와 있는 게 보인다. 그 종이들은 설계도가 아니다. 거기에는 내일 마담 기요틴과 입맞춤하게 될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1746년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난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그림을 배운 뒤에는 유랑 투우사 집단과 함께 에스파냐 전국을 방랑했다. 로마에서 그림공부를 하던 고야는 마드리드로 가서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당시 마드리드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으로 덴마크인 아버지를 둔 독일계 유대인 화가 라파엘 멩스(Raphael Mengs)가 왕궁의 벽과 천장에 그리스 신들을 그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스승인 프란시스코 바예우(Francisco Bayeu)의 누이와 결혼한 젊은 고야는 멩스의 도움으로 왕립 고블랭 공장(책임자가 바로 멩스였다.)에서 직조되는 수많은 태피스트리의 디자인을 맡았다. 이때부터 고야는 순탄하게 경력을 쌓아갔다. 그는 왕립 예술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궁정화가가 되었다. 고야는“카를로스 4세의 가족” 단 한 장의 초상화로, 프랑스혁명 초기의 저급한 언론이 쓴 모든 비방의 글보다도 더 심하게 왕실의 체면을 깎아내렸다. 그러나 카롤로스 왕과 왕비, 대신들은 고야의 초상화가 신성한 왕권의 이념을 가차 없이 짓밟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고야는 고객이 두세 시간만 앉아 있으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천재 화가였다. 고야는 빠른 그림 솜씨 덕분에 유명한 알바 공작부인의 누드 초상화를 그렸을 때 위기를 모면했다. 고야가 자기 부인의 누드화를 그렸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의 남편은 고야의 화실을 찾아가 진위를 확인해보고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에스파냐 귀족의 명예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튿날 화실에 가보니 아내 그림이 있었으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고야는 알바 공작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단 하룻밤 사이에 또 한 점의 초상화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