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판사판(理判事判) >
각기 맡은 직분 다른데
합력하면 선이 이루어지는데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서로 옳다 다투네
나누는 일도
맞추는 일도
이판(理判) 사판(事判) 몫인데
나누기만 할 뿐
맞출 줄 모르네
나누기만 하면
이판사판 막장이 시작되고
맞추다 보면
이판과 사판의 동행이 시작되네
이판(理判) 사판(事判) 어우러진
선한 세상 바라는데
나누기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이판사판으로 변하네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地境)을 뜻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어원은 조선 시대 때 승려(僧侶)의 두 부류(部類)인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을 합(合)쳐서 부르는 말이다. 사판승(事判僧)은 주로 잡역(雜役)에 종사(從事)하여 사찰(寺刹)의 유지(維持)하였고, 이판승(理判僧)은 승려(僧侶) 본분(本分)인 참선(參禪)을 통한 수행(修行)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朝鮮)의 억불숭유(抑佛崇儒)에 정책에 의해 승려가 천인(賤人)으로 전락(轉落)했다. 승려(僧侶)가 된다는 것은 인생(人生)의 막다른 선택(選擇)으로 여겨졌다. 이런 시대적(時代的) 배경(背景)으로 부정적(否定的)인 의미(意味)의 끝장이라는 뜻의 사자성어가 만들어졌다.
판(判) 자는 ‘판단하다’나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판단할 판(判) 자는 반 반(半)
자와 칼 도(刀) 자가 결합한 글자이다. 반 반(半) 자는 소머리에 여덟 팔(八) 자를 그려 넣은 문자로 ‘나누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판단할 판(判) 자는 이렇게 ‘나누다’라는 뜻을 가진 반 반(半) 자에 칼 도(刀) 자를 결합하여 사물을 나누어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判자는 ‘구별하다’나 ‘판단하다’와 같이 진실을 들여다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옛날 증문(證文)을 판서(判書)라고 한다. 이는 문서를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서로 맞추어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연유로 나누는 일도 맞추는 일도 판단할 판(判)의 몫이 되었다.
치킨 게임(chicken game)은 이판사판(理判事判)의 서양식 표현이다. 1950년대 미국 갱 집단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치킨 게임은 겁쟁이를 닭(chicken)에 비유하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치킨 게임이 유행했다. 양쪽 참가자 모두 차를 타고 좁은 도로 양쪽 끝에서 서로를 향해 마주 달린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차량에 겁을 먹고 먼저 운전대를 꺾는 사람은 겁쟁이로 취급된다. 양쪽 모두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는 위험한 게임이다. 20세기 후반 미국-소련의 극단적인 군비경쟁을 비꼬는 표현으로 등장하면서 국제학 용어로 굳어졌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양쪽 모두 파국에 치달을 수 있는 극단적인 경쟁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가장 큰 예다. 이 사건은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설치하고 있음을 미국이 발견하면서 발발했다. 크게 반발한 미국은 쿠바 인근 해안을 봉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자 소련은 핵전쟁 발발 직전에야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했다. 북한이 쓰고 있는 벼랑 끝 외교도 치킨게임의 일종이다. 이판사판의 막다른 골목에서 취하는 배수진이다.
2010년 반도체 산업에서는 회사들의 운명을 건 치킨 게임이 일어났다. 일본 엘피다와 미국 마이크론, 우리나라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상대가 승복할 때까지 겨루겠다고 결심하여 양쪽 가격을 경쟁적으로 내렸고, 결국 승리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에게 돌아갔다. 우월한 기술력과 규모의 경제를 앞세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이길 수 없었던 경쟁사들이 감산을 선언한 것이다. 그 이후 국내 업체들은 ‘승자 효과’를 누리며 점유율을 크게 높였다. 치킨 게임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상대방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차량이 돌진할 때 나는 절대로 핸들을 꺾지 않겠다는 신호를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다. 이때 상대편은 선택권을 갖게 되지만 막상 충돌을 결심하기는 쉽지 않다. 게임이론 전문가인 가와니시 사토시의 연구에 따르면 이론적으로는 치킨 게임을 계속 반복할 경우 사람들은 핸들을 꺾는 쪽을 선택한다고 한다. A, B 두 사람이 치킨 게임에 참여할 경우, 동시에 핸들을 꺾을 때 얻는 이익을 각각 0이라 가정해 보자. B가 먼저 꺾는 경우에는 B는 -5, A는 5이고, A가 먼저 꺾으면 A는 -5, B는 5일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핸들을 꺾지 않는 경우를 각각 -20으로 가정한 뒤 게임을 반복하면 A와 B는 각각 핸들을 꺾는 쪽을 선택한다는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요즘 우리 정치를 보면 치킨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승자독식의 치킨게임보다는 이판사판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또 맞추어 가는 지혜가 정치판에서 사라졌다. 조선시대 육조의 수장인 판서(判書)는 요즘으로 말하면 장관이다. 왜 판서라고 했을까? 판서(判書)라는 직책에는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또 맞추어 가는 지혜, 정치력을 발휘하라는 뜻이 함의되어있다. 정치력을 상실하고 치킨게임에 열중인 작금의 국회의원을 볼 때 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짜증이 난다. 국민에 의해 선택된 그들이기에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회의원이기를 바라고 있는데 사색당쟁을 일삼던 정치모리배를 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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