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 이 또한 지나가리니 > - 한국문학신문 2019년 11월 27일 - 칼럼 연자시편

高 山 芝 2019. 12. 4. 15:22

< 이 또한 지나가리니 >

 

이 또한 지나 가리니

 

가슴에 칼날 품고서

흔들리지 말라네

타면자건(唾面自乾)하라네

 

이 또한 지나가리니

 

고난없는 인생 없다며

포기하지 말라네

와신상담(臥薪嘗膽)하라네

 

이 또한 지나 가리니

 

성공에 도취 자만하지 말고

실패의 늪에 빠저 좌절하지 말라네

이인위감(以人爲鑑) 하라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유대인의 격언은 그들의 경전 『미드라시(Midrash)』에 실린 ‘다윗 왕의 반지’에서 유래되었다. 어느 날 다윗 왕은 궁중의 세공인들을 불러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나를 위해서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사람들이 환호할 때도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큰 절망으로 낙심하고 있을 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반지에 새겨 넣으라” 세공인들은 아름다운 반지는 만들었지만, 정작 거기에 새길만한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 고민 끝에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이때 솔로몬이 일러준 글귀가 바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다.

 

중국의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그녀는 당 태종의 눈에 들어 열네살 때 입궁해 재인이 되었으나 태종은 그녀를 찾지않았다. 대신 태자 이치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측천무후는. 태종이 사망하자 황제가 죽으면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황실 전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들어갔지만 고종 황제와 관계는 지속되었다. 당시 황후 왕씨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녀를 소의로 봉하여 궁궐로 불러들였다. 이 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황후에 오른 그녀는 고종이 지병으로 시력을 잃게 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스스로 천후가 되었다. 측천무후는 권세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탄압책을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능한 인사를 많이 등용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유능한 신하 중 누사덕(屢師德)의 이야기다. 누사덕은 아우가 대주(代州) 자사(刺史)로 임명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형제가 다 같이 출세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건 좋지만, 그만큼 남의 시샘도 남보다 갑절은 된다. 그런데 그 시샘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느냐?"

"비록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결코 상관하지 않고 잠자코 닦습니다. 결코 형님에겐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염려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이 너에게 침을 뱉은 것은 너에게 뭔가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가 그 자리에서 침을 닦으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어 상대는 틀림없이 더욱더 화를 낼 것이다. 침 같은 건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말라 버리니, 그런 때는 웃으며 침을 받아 두는 게 제일이다."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것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타면자건(唾面自乾)의 사자성어 유래이다

 

BC 496년, 월왕 구천(勾踐)에게 패한 오왕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월나라를 절대로 잊지 말라.(必毋忘越)”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2년 후 월왕 구천은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킨다는 말을 듣고 부차를 선제공격했다가 대패했다. 월나라의 수도 회계(會稽)를 포위한 오왕 부차에게 구천은 나라를 바치고 오나라의 신하가 되겠다며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주고 강화를 요청했다. 오자서의 반대를 묵살하고 백비의 계책를 채택한 오왕 부차는 구천을 오나라에 불러들여 자기의 노예로 삼았다. 이를 역사는 ‘회계지치(會稽之恥)’라 고 부른다. 월나라를 대신들에게 맡긴 구천은 3년 동안 부차의 마구간에서 말을 먹였다. 부차가 병이 들자 부차의 변까지 맛보아 가면서 성실히 간호하자 이에 감동한 부차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구천을 석방했다. 월나라로 돌아간 구천은 몸을 수고롭게 하면서 쓸개를 걸어두고 앉거나 눕거나 쓸개를 맛보면서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 사건을 우리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말한다. 오왕 부차에게 미인 서시(西施)를 바친 월왕 구천은 마침내 오나라를 평정하고 춘추시대 마지막 패자가 된다.

 

정관(貞觀)의 치(治)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위징(魏徵)이 죽고 얼마 후 당 태종(唐太宗)은 조정에서 탄식하며 말했다. 구리를 거울로 삼으면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으며(이동위감 가정의관以銅爲鑑 可正衣冠) 옛일을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이고위감 가지흥체 以古爲鑑 可知興替)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이 분명해진다

(이인위감 가명득실 以人爲鑑 可明得失) 내가 일찍이 이 세 가지 거울을 다 가져 나의 과실을 막았거늘 (짐상보차삼감 내방기과 朕嘗保此三鑑 內防己過) 지금은 위징이 죽고 없으니 거울 하나가 없어졌구나 (금위징서 일감망의 今魏徵逝 一鑑亡矣).

 

다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을 경계하는 이인위감(以人爲鑑)의 지혜는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불변의 교훈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