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난 지 꼭 일년이 지났다
일년 전 오늘 가방 두개를 들고 아내와 아이들은 서울로 보내고
코리아테크노의 수금을 위해 이리에서 일박을 했던 그날의 참담함을 잊지말자
테크노에서 받은 어음 500만원이 내게는 전부였다
집사람과 아이들을 경화네 집에 맡기고 김재운회장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을 지금도 후회한다
아라를 누이집에 맡기고 올라오자 채권자들이 아라의 학교까지 찾아갔다
염주동의 아파트 문을 부수고 피아노와 가전제품 등을 자기집으로 옮겨논 이웃의
비정함을, 내 가족이 다리뻣고 편히 누울 곳이 세상에는 없었다
경화네 집까지 경찰이 찾아오고 내용증명이 날아왔다
어머니가 마련해 준 지하 단간방에 가족을 놔두고 반월 처제집으로 잠자리를 옮기고
아침마다 거리를 방황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반월 동산교회의 목사님 설교를 듣고 쏟아졌는 눈물의 의미를,
이혼을 하게 되면 채권자들에게 가족은 시달리지 않을 거라는 짧은 생각으로
아내는 서류상 이혼을 하자고 했다. 참으로 견뎌내기 힘든 시간이였다
집사람은 서울음반계열의 영업 사원으로 취업 내 친구 친척 친지들을 찾아다녔다
아라를 전학시키고 일본에 간다니까 기성이가 100만원 김서방이 100만원 시헌이 형이
30만원을 보내왔다. 평생을 두고 잊지 못 할 기억이다
일본말 한마디도 못한 내가 일본으로 간다니까 지인들의 찬.반이 엇갈렸다
인사차 인천에 들린 나에게 불고기를 해주시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어머니
평생 불효만 했던 아들이였다. 아이들과 용마산기슭의 한 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식당의 가라오께에서 막내 요한이가 부른 소양강 처녀가 이명이 되어 지금도 내 귓전을 맴돈다
오준희 목사님께는 너무 많은 죄를 졌다.
한동안은 목회를 할 의욕까지 잃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부도나기 전 날 찾아간 나에게 남들이 모르는 서울이나 부산으로가 막일이라도 하면서
살라 하시던 말씀을 나는 평생 잊지 못 할 것이다
지금은 노가다를 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편하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땀 흘리며 일 하는 노동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나의 천박한 자존심이 아직도 살아 있어 후루가와(古川)에게 언성을 높였다
평배인 그의 말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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